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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와이어 소인정 주부기자] 며칠 전 '대통령 앞에서 눈물 흘린 청년단체 대표 기사가 신문과 뉴스를 도배했다. 

저성장, 높은 청년 실업률은 정부와 정당들이 이 문제에 대응할 채비를 갖추지 못해 온 상황이라 세계적으로도 이미 한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우리의 숙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답답하고 묵직한 만성적인 체증(滯症) 같은 문제 중 하나이며, 어쩌면 나라의 미래와 직결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청년들의 구직활동을 위해 불가피하게 소요되는 비용에 대한 청년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서울시에서는 지난 2016년부터 만19세~34세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대략 3000여명에서 5000여명 사이의 인원을 뽑아 매달 50만원씩 최대 6개월 동안 지원해 주는 제도인 “청년수당”을 시행하고 있다.

지원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생애 단 한번! 매월 50만원씩x(최소3개월 ~ 최대6개월) 지원 예정이며 4개월째 지급 분부터 자기활동기록서 제출자에게만 지급된다.

2019년 청년수당 참여 안내 공지사항을 보면 작년과 바뀐 부분이 있는데 신청기준이 '최종학력 졸업 후 2년이 지난 자(者)' 로 기준이 강화 되었다.

※ 서울시 청년수당(청년활동지원사업) 공식사이트 https://youthhope.seoul.go.kr 통해 자세한 내용 확인과 지원이 가능하고 2019년 서울시 청년수당 신청접수는 선착순이 아니고 최종 등록한 서류를 심사하여 선정한다. 신청기간은 2019. 4.1 09시~ 4.15 18시까지다.

참고로 '졸업 후 2년 이내인 자(者)'는 '워크넷'이라는 사이트에서 청년수당 제도가 아닌 2019년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인 고용노동부 “청년구직활동지원금”으로 신청할 수 있으며 서울시민이 아니더라도 신청이 가능하다.

 

솔직히 이 제도는 그 동안  “선심(善心)성 포퓰리즘” 이냐, “보편적 복지“냐 하는 계속되는 논란 속에서도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일각에서는 `다른 약자들을 지원하지 않고 왜 청년을 지원하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청년들에게 지급하는 이 수당은 결코 청년들의 “힘듦”을 보상하는 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제도는 시혜(施惠)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돈이 없어서 자기계발을 못하는 청년들에게 자기계발 비용을 지원해주는 것이기에 그 의미가 와전(訛傳)되어서는 안되며 이런 식의 투자가 사회에는 더 큰 부가가치 창출로 돌아온다는 큰 그림을 그리며 시행하는 제도일 것이라고 진정 믿고 싶다.

왜냐하면, 청년수당은 서울시가 시 자체의 재정을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기에 국민의 피눈물 같은 세금으로 정부가 지키지 못한 약속, 지자체별로 대책 강구 미션은 던졌지만 그 성과를 찾을 수 없는 “청년 실업률 해소”의 입막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 청년수당을 저소득층 지원으로 오해하고 대상자 적격에서의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청년수당은 저소득층을 위한 지원사업이 아니다. 선발 기준을 자세히 살펴보면 청년수당을 받게 된 사람들은 다른 복지혜택에서 거리가 멀었기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자체 중심으로 시행되기에 재정이 어려운 지자체에는 많은 민원이 접수되고 있다고 한다. 재정에 여력이 없다면 마땅히 자체적인 세출삭감 노력을 해서라도 차별화된 복지제도를 운영해야 하며, 그들의 능력 안에서 대안을 고민하고, 차별화된 복지제도를 고안하는 노력이 있어야 국가 전체의 복지 수준이 향상되는 것이지, "우린 못하니까 너희도 하지 마라"는 식의 자세는 결국 하향평준화를 불러올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 나이는 이런 제도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색안경을 끼고 보자면 한없이 꼬아 볼 수도 있는 입장이지만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기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시선을 모아보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평등한 기회의 조건을 무엇인지,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결과가 정의롭다는 것의 바름은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세대에서도 충분한 논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결국은 자신이 본 것, 들은 것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보고 들은 것들이 마음을 이루고 ‘생각’과 ‘가치관’을 만들며, 이러한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되는 것이기에 인생의 기로에서 청년들이 건설적인 나라를 계획하고 구성원으로 건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는 정치적인 색깔을 입히지 않고 그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도록, 부디 투명하게 운영되기를 바라며 국민 모두가 같이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장(場)이 되길 바래본다.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수용하고 공감하려 애쓰는 것은 공감에 대한 강박이지 결코 공감은 아니다. 엄청난 에너지 소모이며 이런 식으로 버티기는 힘들다. 

아직까지는 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무슨 수로 공감하겠나….싶은 아쉬움이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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