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언론, 아베 정권 참의원 선거에 한국 수출 규제 이용 비판
주요 언론, 한일관계 악화 제동걸기 힘들 듯
밀접하게 연결된 한·일 제조업 구조… 일본 기업 부메랑 가능성도
수출규제→‘백색국가’ 취소 땐 한국 제조업 기반 흔들

[서울와이어 이동화 기자] 일본 정부가 지난 4일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시작하면서 일본은 물론 각국 외신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일본의 조치를 사실상 ‘보복’으로 규정한 우리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일본 제품 불매는 물론 관광까지 자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관련 산업에 불안한 기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오는 10일 국내 30대 그룹 총수 등을 청와대로 불러 긴급 간담회를 할 예정이지만 정부가 꺼낼 카드가 있는지 불확실성이 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본 관련 업계도 불안에 떨고 있다. 한국 기업들은 소재 확보에, 일본 소재 업체들은 새로운 심사 기준에 맞추기 위한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은 “규제 대상 품목은 일본이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가 국산화 지원에 나섰다”며 “중기적으로 볼 때 일본 기업의 경쟁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한일 기업 대응에 전전긍긍… 日정부, 韓규제 선거에 이용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일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반도체 소재 수출 허가 신청을 엄격하게 하고 안전보장상의 우호국 지정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WTO 협정 위반”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일본은 4일 계획대로 수출 규제를 단행했다.

규제 대상이 되는 핵심 품목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기판 제작에 쓰이는 감광제 ‘리지스트’, 반도체 세정에 사용하는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 등으로 개별 심사와 허가가 필요해진다. 지금까지는 수출 절차를 한번에 일괄 처리하는 ‘포괄 허가’ 방식이었지만 앞으로는 각 계약마다 개별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정부 허가에는 보통 90일 정도가 소요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는 8월에는 첨단재료 등의 수출과 관련 안전보상상 우호국으로 인정하는 ‘백색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방침이다. 일본이 지정한 27개 백색 국가에서 인정을 취소하는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다. 과거사 문제에 통상으로 맞선 셈이다.

한일 간의 외교 대립이 ‘무역전쟁’으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지난 3일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맞서 소재부품산업 육성에 매년 1조원 수준의 투자를 추진하기로 했다.

하지만 참의원 선거운동 개일일에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단행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후속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데 따른 보복 조치”라고 주장했고 자민당은 선거 운동 연설이나 유권자와의 만남 때마다 수출 규제 강화를 전면에 내세우며 유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서는 미·중에 이어 한·일 간에서 일촉즉발의 무역전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며 내년 재선을 앞두고 중국·EU 때리기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던 아베 총리가 트럼프 따라잡기에 나선 게 아니냐고 비꼬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는 “자유무역 주창자인 아베 정권에 대한 전 세계의 평가가 손상될 것”이라고 비난했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이 제 발등을 찍고 있다”며 일본 기업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던 일본의 위선이 드러났다”며 아베 정권을 비꼬았다.

일본 언론들은 “반도체 수출 규제가 일본 산업의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며 아베 정권을 비판하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인에 대한 비자 발급을 엄격화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번 규제 배경에 한국 규제를 참의원 선거에 이용하려는 아베 정권의 의도가 보인다”며 “한국에서도 강경한 국내 여론(반일 감정)에 힘입은 정부가 대립을 심화시켜 양국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걸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日언론, ‘희토류’ 전철 밟을 수도… '탈일본' 우려 확대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은 “아베 정권의 한국 반도체 규제는 지난 2010년 중국이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 당시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희귀 광물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던 것과 같다”며 일본 정부가 모순적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중국이 일본에 대한 희토류 수출 규제를 단행하자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비축해둔 희토류로 버틴 후 호주 등 다른 국가로 공급원을 변경했다. 결국 97%에 달했던 중국의 전 세계 희토류 생산 비중은 8년 만에 70%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의 중국산 희토류 점유율 역시 2010년 80%에서 2017년에는 60% 수준으로 낮아졌다.

일본 기업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한국 기업의 ‘탈일본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이니치신문도 당시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일본 기업의 ‘탈중국’이 성행했던 것과 같이 한국의 기술 개발과 공급원이 다양해지면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우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니시무라 야스토시(西村康稔) 일본 관방부 부장관은 4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한국이 반발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의 조치는 안전보장을 위한 수출관리 제도의 적절한 운용에 필요한 재검토라며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른 것이므로 협정 위반이라는 지적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 수출 규제 이어 ‘백색국가’ 취소 땐 제조업 기반 흔들릴 수도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1~5월 일본으로부터 규제 대상 품목을 수입한 금액은 약 1억4400만 달러다. 리지스트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일본에 90% 이상을 의존하고 있다. 일본 의존도가 높아 아베 정권이 노릴 만한 부문인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해당 품목의 재고량이 삼성전자에는 ‘1개월 정도’, SK하이닉스의 경우 ‘3개월 미만’이라며 공장 조업 중단 사태를 피하기 위해 소재확보에 분주하다고 보도했다. 이어 액정 제조공정에서 에칭가스를 사용하는 LG디스플레이도 재고 파악에 초비상이 걸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본 관련 업계에서는 “반도체 산업의 경우 한국과 일본의 기술력 차이가 크다는 점은 한일 업계 관계자라면 모두 인정하는 부분”이라며 “단기적으로는 한국 기업이 일본 이외의 국가로 공급원을 대체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지만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핵심 소재·부품·장비 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할 경우 일본 기업의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수출 규제에 이어 경제계가 우려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다음달 1일 ‘수출무역관리령’을 개정해 한국을 안보상 우방국가인 ‘백색국가’에서 제외할 경우 국내 제조업 기반이 흔들릴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메모리 가격 하락과 수요 부족에 따른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한국의 반도체 수출은 지난달 7개월 연속 하락했다. 감소폭도 3년5개월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맞불을 놓아야 하나, 외교‧정치 채널을 통해 갈등을 해소해야 하나. 정부와 기업의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당장 일본의 반도체 소재 핵심 기술력을 따라잡기 어렵겠지만 중국의 대일 희토류 수출 중단이라는 전례를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 경제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이 주효할 것이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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