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국 대상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 / 연합뉴스

 

[서울와이어 염보라 기자] 일본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놓고 한국 정부가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8일 재계에 따르면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일 대기업 총수들을 만났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이 자리했고, 일본 출장 중인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은 빠졌다. 청와대는 "대외 경제상황의 불확실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다"고 설명했다.

오는 10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30대 그룹 총수들을 만나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이에 앞서 당·정·청은 반도체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위해 매년 1조원 수준을 집중 투자키로 결정했다. 아울러 일본의 수출 규제가 전반적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일반 부품 연구개발에도 5조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세부 대책안은 이달 말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서는 '환영한다'는 입장과 함께 '늑장대응'이라는 지적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일찍이 반도체 소재 국산화에 대한 필요성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정부의 안일한 태도로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다.

 

◇ '터질게 터졌다'… 대일 소재·부품 교역 5년간 90조원 적자

일본 정부는 지난 4일 반도체 핵심 소재 3종(포토리지스트·에칭가스·플루오린 폴리이미드)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이들 소재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은 한국 업체에 수출할 경우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한국 수출 첨단소재·장비에 대한 전방위적인 제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소재·부품의 대일(對日) 의존도가 높은 편으로,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 전체에 위기감이 고조될 수 있다고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한국은 일본과의 소재·부품 교역에서 100억 달러 이상 적자를 지속해 왔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일본과의 소재·부품 교역에서 151억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최근 5년간 적자 규모는 763억 달러에 이른다. 한화로 약 90조원 규모다. 올 들어서도 6월까지 67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반도체 부문의 대일 의존도가 크다. 한국무역협회 집계로, 대일 의존도가 높은 상위 10개 품목 가운데 4개가 반도체 관련 분야다. 반도체 제조장비(지난해 기준, 52억 달러), 시스템 반도체(19억 달러), 개별소자 반도체(10억5000만 달러), 제조장비 부품(9억5000만 달러) 등이다.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를 실시한 3개 품목도 대일 의존도는 막대하다. 에칭가스(5월 말 기준, 43.9%)를 제외하고 포토리지스트(91.9%)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93.7%) 모두 90%대를 웃돌았다. 일본의 이번 수출 규제 조치를 두고, "터질게 터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3일 국회에서 고위 당정청협의회가 열리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국내 수출 1순위 반도체 산업 R&D 나몰라라… 현실 안주 정부 비난 이어져
 

통계가 상황의 심각성을 일찍이 나타내고 있었지만, 정부의 대응책 마련은 없었다. 반도체가 우리나라 수출 기둥임에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기업에 전적으로 의지한 측면이 컸다.

정부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가 있다. 최근 진행된 한 컨퍼런스에서는 정부가 2008년 이후 10년간 단 한 번도 서울대반도체연구소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책 연구개발(R&D) 과제를 선정할 때도 반도체 관련 프로젝트는 뒷전이었다는 불만도 이어졌다.

한발 더 나아가,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는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대응 방안 검토’ 보고서를 통해 "일찍이 학계를 중심으로 반도체 소재 국산화에 대한 필요성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큰 진전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연구회는 "세계 최고의 반도체 회사를 보유하고 있으나 반도체 프로세스를 개발할 수 있는 공동 연구소가 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반도체 프로세스를 개발할 수 있는 연구소가 있다면 초기 개발과 함께 재료를 개발할 수 있게 돼 전략적인 특허 확보와 초기 진입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반 기술을 선도할 수 있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 5G도 세계 최초 상용화 성공 불구 정부 규제에 손발 묶여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분야는 많다. 세계 최초로 상용화에 성공했으나 정부 규제에 손발이 묶인 5G가 대표적인 분야다.

5G는 경제적 가치만 20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5G를 두고 글로벌 패권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으나, 한국은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따냈음에도 정부 규제로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빅데이터 활용을 가로막는 개인정보보호 규제나 가격 경쟁력을 낮추는 요금 규제, 방송·통신 융복합을 원천적으로 막는 방송 규제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한편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대화도 모색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일본 측에 양자협의를 제안했으며 의제와 일정 등 실무진간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는 이날 대외경제장관회의 모두발언에서 "우리 업계 및 국제사회와의 긴밀한 소통, 공조 등을 통해 다각적이고도 적극적인 대응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며 "우리 기업의 피해 최소화와 대응 지원에도 역점을 두겠다"고 약속했다.

재계 관계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추가 제재를 강행한다면 한국 재계가 받게 될 타격도 상당할 것"이라며 "정부는 일본과의 원만한 해결책 마련에 나서는 한편, 이번 일본 수출 규제 사태를 반면교사 삼아 신성장 동력을 키우기 위한 규제 혁신, 기존 수출 주력품목을 견고히 가져가기 위한 소재·장비 개발 지원 등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bora@seoulwire.com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