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서울와이어 소인정 주부기자] 모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해 듣거나 말하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죽음이 과연 그렇게 혐오스럽고 기피해야만 할 일인 걸까?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며, 노화의 과정을 지나 결국 죽음에 이른다.

내 의지대로 아름답게 사는 건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웰빙(well-being)과 함께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웰다잉(well-dying)’은 글자 그대로 ‘잘 죽는 것’이다. 잘 죽어야 잘 사는 시대, '웰다잉'(Well-dying) 시대다.

고령화에 따른 각종 질병의 증가, 가족 해체와 1인 가구의 확산으로 급증하고 있는 고독사등 사회적 현상으로,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평안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을 여유있게 준비하는 웰다잉이 하나의 트렌드로 부각되고 있다. 

아무리 의학과 과학이 발달되었다 해도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삶의 모퉁이를 돌아 죽음을 마주칠 때가 바로 내일이 될지, 아니면 십 년 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는 매일매일을 정신 없이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살았던지 간에 결국은 공평하게 “죽음”을 맞이 할 시간이 오는데, 이 죽음을 막다른 벽으로 여길지, 아니면 열린 문으로 여길지는 오늘 어떤 준비를 하며 사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예를 들자면 2009년 2월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있다. 생명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런 죽음의 과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을 몸소 실천해 보이셨는데, 평소 존엄사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서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인공호흡기와 같은 기계적 치료에 의한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왔다.

뉴질랜드에 사는 79세의 할머니는 “쓰러져도 날 살리지 말라”는 문신을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인데 이 할머니는 본인의 마지막 의사 표현을 혹시라도 구급대원이 이해 못할까 봐 문장 전체를 문신으로 새겼고, 또 앞으로 쓰러졌을 경우 가슴의 문신을 못 볼 가능성에 대비해 어깨 뒤편에 “앞으로 뒤집어 보시오”라는 문신까지 새겨놓았다고 한다.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두 분 모두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마지막을 준비하셨기에 노년을 보다 즐겁게 보내셨을 것 같은 추측이 들었다. 적어도”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실천하신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까운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무리 하는 것을 행복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긴다.

우리나라는 타인이나 어른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금기시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준비도 미흡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30여 년 전만 해도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호상(好喪)이라고 여겼으며 집 밖에서 객사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말기 질환으로 입원 중인 환자라도 임종이 임박하면 인공호흡장치를 한 채 퇴원해, 집에 도착하는 즉시 장치를 떼고 순리대로 임종을 맞게 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생명 연장 의료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요즘에는 30여 년 전과 정반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객사(客死)’를 한다. 

사고로 절명하거나 갑작스런 심정지로 죽지 않는 인간은 대부분 병사할 수밖에 없다. 일단 병상에 눕고 나면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닌 보호자와 의료인의 손에 맡겨지게 되는데 생을 이어가는 연명 치료를 하게 될 때, 생명의 주인인 ‘나’의 의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그렇기에 생(生)을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웰다잉도 건강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시간적인 계산이 나온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노랫말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평생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내 삷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도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효(孝) 사상이 뼛속까지 박혔던 우리나라가 믿어지지 않게 노인 자살률·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고라 한다. 이 불명예스런 타이틀 때문이지는 모르겠으나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지난해부터 시작된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고령화 추세는 향후 수년간 계속해서 늘어나 우리 사회는 이제 초고령화 시대를 준비해야 하고 요즘 젊은이들은 낮은 취업률, 연금에 대한 불안감등 여러가지 사회문제로 인해 결혼후의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결혼을 기피하고 있어 해마다 출생아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태어나는 인구보다 세상을 떠나는 인구가 더 많아지는 시대를 코앞에 두고 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존엄성을 지키며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이른바 ‘웰 다잉(well-dying)’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지원하는 국내의 현실은 아직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최고 수준의 노인 자살률이다. 2017년 기준 10만명당 노인 자살자 수는 47.7명으로 전체 평균(24.3명)의 약 2배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8.4명)과 비교하면 거의 3배 수준으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불명예스러운 1위를 유지하고 있고, 65세 이상 인구의 빈곤율 역시 48.8%로 OECD 노인 빈곤율 평균(12.1%)보다 4배 가까이 높아 역시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웰 다잉’을 가로막는 두 장벽인 사회적 양극화와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한 인식 부족이 결합돼 아직까지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우선은 노년에 이르면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하는 지원책이 마련돼야 ‘극단적 선택’ 역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였고 빠르게 초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어, 이제는 웰빙(well-being)에 이어 웰-다잉(well-dying)을 통한 복지정책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급하게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노인 문제를 담당하는 수도 없이 많은 여러 기관에 속한, 수도 없이 많은 인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적극적인 그들의 대책을 한 번 믿어본다. 

쉽게 말했던 웰빙. 그저 잘 먹고 잘사는 문제만이 아니다. 건강수명까지 행복하게 잘 살다가 행복한 죽음을 준비하는 웰다잉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죽음도 내 삷의 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잘 마무리한 내 삶의 가장 화려한 피날레였으면 한다. 

 

home@seoulwire.com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