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와이어 염보라 기자] 지난해 12월 8일 그 날을 기억한다.

평소 표현에 인색한 기자의 아버지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딸을 신경 쓸 겨를 없이 소리 내어 흐느끼셨다.

그때 우리 가족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상황을 그린 영화 <국가 부도의 날>를 보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왜 우셨느냐고.

아버지는 그 당시 오래된 친구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IMF 발표 이후 130만명의 실업자를 양산해 고실업국가로 접어들었고 자살율은 전년 대비 43%퍼센트나 증가했다고 하니, 이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와 같은 감정을 느낀 분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를 보고 특히 귓가에 남은 대사는 "대한민국 경제는 펀더멘탈(기초체력)이 튼튼해서 괜찮다"는 정부의 말이었다.

서로 살기 위해 어음을 폭탄 돌리기 하고 수많은 기업과 가정이 망가져도 정부는 그저 '펀디멘탈이 튼튼하니 안심하라'는 말만 되풀이 했고, 정부의 말을 믿고 인내한 '착한' 국민들은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영화 속에서 웃을 수 있었던 건 정부 말을 '거짓말'로 규정한 윤정학(유아인 분)과 그의 일당들뿐이었다.

적신호를 울리는 현재의 경제지표들과, 그럼에도 낙관론을 펼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이 영화가 오버랩(Over lap)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5일 코스피는 3년1개월여 만에 최저치인 1946.98로 장을 마쳤고, 코스닥은 569.79로 약 2년5개월 만에 600선을 하회하는 동시에 무려 4년 7개월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달러 환율은 5일 1203.6원으로 출발해 오후 3시42분 기준 1215.00원까지 올랐다. 역시 2년7개월 만에 최고치다.

기업의 영업이익은 두자릿수 급락했고, 적자회사는 크게 늘었다. 국내외 투자은행(IB)들은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줄줄이 내렸다. 2.0%에 턱걸이할 것이란 의견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일본의 수출규제까지 더해지며 2% 미만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현재 정부의 반응은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가뜩이나 침체된 경제 상황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에 이은 금융 규제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으나 경제부총리, 금융위원장 할 것 없이 앞다퉈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 금융위는 아얘 '한국 신용장에 대한 일본계 비중은 올 상반기 기준 약 0.1%로 매우 미미하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물론 정부가 현재 일어나지 않은 일을 운운하며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IMF 금융위기 당시보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탈이 튼튼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와 금융당국은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전에 사태 악화를 사전에 막기 위한 노력을 선행하라는 것이다. 곳곳에서 경고음을 울리는 상황에서 발발(勃發)된 일본의 금융 보복은 제2 외환위기의 '트리거(방아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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