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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와이어]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사후 138년인 1994년 슈만의 병원 진료 기록이 공개됨으로써 그의 죽음의 원인이 매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20세가 되면서 우울증이 조울증으로 발전하고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된 슈만의 현상은 매독 제 2기, 제 3기의 일어나는 뇌에 손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은 중독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당시 수은 중독의 치료제는 매독 치료제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슈만은 1810년 독일 작센 지방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출판업자와 저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문학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슈만은 아버지 영향으로 문학에 심취하여 실러, 괴테, 바이런 등 위대한 시인의 작품과 그리스 비극을 읽으면서 감수성 키웠다. 1822년 ‘음악 미학에 관하여’ 에세이를 써서 아버지가 간행하는 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슈만의 어머니는 외과 의사 딸로 가수였으며 슈만의 음악적 재능이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듯하다. 슈만은 7살 때 이미 스승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으니 이제 하산하여라” 할 정도로 칭찬받는 학생이었다. 슈만은 음악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182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정을 부양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변호사가 되어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명문대 하이델베르크 법대로 전학했다. 그러나 1830년 프랑크프루트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은 후 슈만은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슈만은 비크의 음악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비크에게는 클라라(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1896)라는 딸이 있었다. 클라라는 모차르트처럼 신동 피아니스트로 유럽각지에 연주 여행을 했다. 비크의 이혼으로 클라라는 5세부터 어머니 없이 자랐으며, 아버지의 엄한 교육과 학구열로 유럽에서 천재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슈만은 빨리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열정으로 무리한 연습과 스스로 고안한 손가락을 훈련하는 연습 기계도 만들어 힘을 기르려고 했다. 그는 열정이 과해 손가락을 너무나도 혹사하여 결국 손이 마비되었다.

 

슈만이 차선책으로 선택한 길은 음악평론가와 작곡의 길이었다. 

1834년 4월 3일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ur Musik) 잡지를 창간하고 음악가와 음악에 관한 글을 썼다. 슈만은 가공의 인물로 구성된 ‘다비드 동맹’을 만들었다. 이 단체의 회원으로는 이미 죽은 모차르트와 베토벤, 살아 있는 베를리오즈, 쇼팽, 플로레스탄과 에우제비우스, 슈만 등이 있었다. 

슈만은 두 개의 필명을 사용했다. 부드럽고 온화한 긍정적인 글에는 ‘오이제비우스(Eusebius)’를, 신랄하고 공격적이인 부정적인 글에는 ‘플로레스탄(Florestan)’의 필명으로 대립적인 인물로 사용했다.

 

슈만은 훗날 1837년 18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연작집으로 《다비드 동맹 무곡 Op.6》을 작곡했다. 

 

1836년 비크 교수의 딸이자 당시 천재 피아니스트인 클라라가 슈만의 눈에 들어왔다.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겠다는 말에 비크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어릴 때부터 천재 피아니스트로 애지중지하게 키운 클라라를 무명음악가인 슈만이 결혼을 하겠다니 이건 속담 중 ‘죽 쑤어 개 준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듯하다. 비크의 반대로 몇 년간 법정 싸움까지 갔으며 결국 법원은 슈만에게 손을 들어주어 1840년 클라라와 결혼하게 되었다. 

슈만은 1840년은 ‘가곡의 해’, 1841년 ‘교향곡의 해’(1번과 4번 초고), 1842년 ‘실내악의 해’로 한 해에 한 장르에 집중하였다. 1843년 멘델스존이 설립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교수가 되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1845년 회복이 되는 듯하여 <피아노 협주곡 Op.54>, <교향곡 2번>완성하였고, 1850년 뒤셀도르프로 가서 음악감독직을 하게 된다. 지휘자로서는 그다지 능력이 있지 않았던 슈만은 청중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로부터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1853년 무렵부터 슈만에게 심각한 정신적인 증상과 환청이 더해졌으며, 밤에는 죽은 작곡가의 귀신이 그에게 "영혼의 주제"를 알려주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해 슈만은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하힘에게 브람스를 소개받았다. 20세의 브람스를 환대하며 1853년 10월 28일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 브람스를 "이 시대의 이상적인 표현을 가져다줄 젊은이"로 소개했다. 1854년 2월, 슈만의 증상이 매우 심각해져서, 스스로 환각 증상의 문제를 자각한 슈만은 아내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클라라에게 조심시키기도 했다. 2월 27일 슈만은 라인강의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하지만 뱃사공에 의해 구조됐으며, 결국 본 근처의 에덴니히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슈만은 그곳에서 요양하며 1856년 7월 29일 죽음에 이른다.

 

<글=김유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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