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위키피아-쇼팽의 연인인 ‘마리아 보드진스카’]

 

[서울와이어] 예술가들에게 이성은 창작활동에도 큰 도움을 준다.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에게도 보이지 않게 영향을 준 여인들이 있었다.  

 

첫 번째 여인 콘스탄차 글라드코브스카(Konstancja Gladkowska, 1810-1889)

쇼팽은 피아니스트로 환호를 받으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에서 연주 여행을 했었다. 1830년 다시 빈으로 가기 전 고별 연주회를 했는데, 그곳에서 첫사랑 콘스탄차 글라드코브스카를 만났다. 콘스탄차 글라드코브스카은 쇼팽이 다니던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녔다. 그녀는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였으며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로 주위에 흠모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녀를 위해 기병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쇼팽 역시 이루지 못할 짝사랑에 그쳤고 말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한 채 가슴 앓이만 했다.

 

“나는, 드디어 나의 이상형을 만났다네. 하지만 아무런 말도 못한 채 벌써 6개월간 끙끙 앓고 있어. 나는, 종종 그녀의 꿈을 꾸지. 그리고 그녀에 대한 상상 속에서, 나의 새로운 협주곡의 아다지오 악장을 작곡했다네.”

-쇼팽의 친구 티투스 보이치코프스키(Tytus Woyciechowski)에게 쓴 편지 중

 

1830년 빈에 도착한 후 쇼팽의 고국 폴란드에서는 민족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오스트리아가 폴란드에게 적대감을 갖자 폴란드인인 쇼팽은 위험인물로 되었다. 쇼팽은 혁명군을 결심하고 고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폴란드로 가지 못하고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의 쇼팽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점 차 상류층 살롱에서 좋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곳에는 베를리오즈, 리스트, 벨리니, 멘델스존, 하이네, 들라크루아 등과 친분을 유지했으며 1838년에는 파리 시민들에게도 유명해졌다. 

 

두 번째 여인 마리아 보드진스카.마리아 보드진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

마리아 보드진스카의 가족은 쇼팽이 어린 시절 잘 알던 사이였다. 보드진스카 가족은 1831년 폭동 때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났고 그 후 제네바에서 살았다. 1836년 보드진스카 가족은 여름휴가차 드레스덴을 방문하였다. 쇼팽은 칼스바드를 다녀온 후 드레스덴에서 숙녀가 된 성숙한 마리아를 보고 그녀에게 푹 빠지고 말았다. 마리아를 위해 《왈츠 Op.69 No.1》를 작곡하였다. 후에 ‘이별’이라는 부제를 갖었다. 

쇼팽은 1836년 《에튀드 Op. 25 No.1》과 반지 《The Ring》을 작곡하여 마리아에게 헌정하면서 9월 8일 청혼하였다. 마리아의 부모는 쇼팽이 파리의 살롱에서 시간 보내는 것을 삼가라고 만류했다. 쇼팽은 9월11일 파리로 떠났고 다시 살롱 사교계의 생활로 돌아갔다. 쇼팽은 몸이 많이 안 좋아 마리아에게 일찍 오지 못했으며 다시 그녀를 찾았지만 쇼팽의 허약함을 안 보드진스카 주위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마리아 보드진스카를 위해 작곡한 쇼팽의 《왈츠 Op.69 No.1》]

 

<글 : 김유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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