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

 

[서울와이어] 브람스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른과 더블베이스 연주자였다. 가정형편이 그리 좋지 않은 브람스는 10대에 연회장, 술집 등에서 피아노를 연주도 했다. 

브람스는 1850년에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Eduard Remenyi, 1828-1898)를 알게 되어 1853년 레메니와 첫 연주 여행을 시작했다. 

레메니와의 여행은 브람스를 음악가로 걷게 한 인생의 길이었다.

브람스는 하노버에서 레메니에 의해 요아힘(Josef Joachim, 1831~1907)을 알게 되었고 바이마르에서 파란츠 리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요아힘은 19세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 상당한 유명세를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다. 요아힘은 브람스가 피아노보다 작곡에 더 소질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슈만에게 편지를 써서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했다. 브람스는 뒤셀도르프에서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 슈만을 만나게 되었다. 슈만은 평론지인 『음악신보』에서 브람스의 재능을 유럽에 널리 알렸다. 

이듬해인 1854년, 슈만은 정신 발작이 심해져 라인강에 투신한 후 어부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리고 슈만 스스로 정신병원 엔데니히에 입원하게 되었다. 브람스는 자신이 존경하는 슈만 부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러나 1856년에 결국 슈만은 세상을 떠나고 브람스는 혼자 남은 클라라 슈만과 7명의 아이를 돌보면서 가깝게 때론 멀리서 지켜주었다. 

 

슈만이 사망한 2년 후 1858년 브람스는 괴팅겐 대학교수의 딸이자 성악가인 아가테 폰 지볼테(Agathe von Siebold, 1835~1909)와 약혼을 하지만 브람스는 돌연 파혼을 선언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에 빠져 다시 결혼하기 까지는 10년 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브람스의 재정은 186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의 성공으로 풍부해졌다. 그러나 검소한 생활을 했던 브람스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거나 젊은 음악가들에게 무명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이후 클라라 슈만의 셋째 딸인 율리(Julie Schumann, 1845-1872)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율리는 1869년 이탈리아의 마르모리트 백작과 결혼했다. 

 

19세기 유명한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한스 기도 폰 뷜로 남작(독일어: Hans Guido Freiherr von Bülow, 1830-1894)는 바흐, 베토벤 그리고 브람스를 3B로 부르기도 했다. 생전에도 유명세를 치르고 있던 브람스이지만 그런 유명세에 비하면 영화음악에는 몇몇 곡을 제외하고 그다지 쓰임이 많지 않다. 

 

1942년 상해의 거리를 배경으로 한 이안 감독의 영화 ‘색계’는 엄청나게 노출이 심한 영화였다. 하지만 이면에 내용은 스파이로 서로 의심하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영화였다. 이선생(양조위 분)를 암살하기 위해 ‘막 부인’ 신분으로 위장한 왕자스(탕웨이 분)과의 미묘한 심리전이 있던 영화였다. 둘의 끌림을 느끼는 식사 장면에서 브람스의 intermezzo Op.118-2의 음악이 흐른다.

 

이 곡은 브람스가 1893년 클라라 슈만에게 헌정한 곡으로 6개의 피아노 소품집이다. 4곡의 인터르메조와 1곡은 발라드, 1곡은 로망스로 모두 6곡으로 되어있다. 그중 2번과 6번이 유명하다. 

 

<글 : 김유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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