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와이어 소인정 주부기자] 며칠 전 어렵사리 휴가를 내어 성북구에 소재한 주민센터에 방문했었다. 

직접 내방해서 처리를 해야 하는 업무라 부득이하게 방문했던 것이었는데 담당자중 한 명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갑자기 결근을 해서 업무 인수인계를 받은 지 일주일 밖에 안된 새내기 담당자가 모든 민원 처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주민센터 공무원들의 이기적인 응대와, 차선책도 안내 못하는 답답한 행정처리로 내가 요청한 간단한 변경 요청 건을 처리하는데 2시간 가량이 소비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현장의 주인공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 조차도 믿지 못 할 일이었다. 금 쪽 같은 시간을 새내기 담당자의 어찌할 수 없는 미숙함 때문에 소비하게 되어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주민센터에서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나와 다른 민원인들의 성화와 불만 토로에 대한 답변은 오직 “번호표 뽑고 기다리세요” 가 전부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불편하시겠지만 조금 더 기다려 달라던지, 불편 드려 정말 죄송하다는 양해의 말을 나서서 전하는 책임 공무원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동료의 미숙함을 도와 주려고 나서는 직원도 없었다. 그들이 제공하는 부적(符籍) 같은 번호표를 뽑아 들고 생각지도 못한 시간소비에 당황해서 앉아 있지도 못해 서서 발만 동동거리는 민원인들을 한결 같이 “투명인간”으로 취급하는 귀신집단 같았다. 

더 가관인 것은 민원인들이 일 처리도 해결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집단의 최고 책임자는 그들의 점심시간만은 칼 같이 지키며 메뉴를 논(論) 하면서 떼를 이끌고 홀연히 나가는 것이 아닌가...

(민원의 현장에서 최고 책임자의 의연함이 빛을 발하는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내 아둔한 머리로도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저 담당자를 탓해봤자 아무 소용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발급한 서류 한 장을 건네주며 또박또박 수수료 안내를 하는 담당자의 얼굴을 보며 정말 대단한 조직원이구나 감탄이 절로 나올 뿐~

나도 그랬지만 여태 주민센터에 민원 서류 발급 차 방문하면서 어떤 서비스를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무인발급기로 해결이 안되기 때문에 방문했던 것인데 서비스를 바라지도 않았던 곳에서 일종의 “무시” 당하고 오니 뒷골이 띵~.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관공서 공무원을 싸잡아 뒷담화를 하려다가 스스로에게 “도대체 내가 생각하는 서비스란 것은 무엇이었나”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서비스란 무엇일까? 딱 정의 내려 말로 표현 하기는 좀 어렵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은...? 하나의 음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동음다의어라는 것은 알겠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예전의 서비스는 [덤]이었다. 거저 주어지거나 어떤 제품에 곁들여져 고마움의 표시로 여겨 지거나, 소비자가 별도의 비용 지출을 하지 않고 그냥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의 서비스는 무형제품의 하나로 단순히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당당히 그 값어치를 받고 제공되는 무형의 상품이며 생산되는 동시에 소비되면서 편의성, 즐거움, 안락함을 제공해주는 모든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서비스는 기본적으로는 눈에 보여지지는 않는다, 자격 있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특별한 옷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없는 서비스는 느껴야만 하는데 그 품질을 느끼기 위해서는 다른 유형적 특성을 활용해서 품질을 유추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서비스에 잔뜩 기대를 갖고 접근하는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키려면 작두라도 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작두를 타서라도 제공된 기대와 제공 후 기대가 “일치” 할 수만 있다면, 꼭 일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의 “긍정적인 불일치”를 이끌어 낼 수만 있다면 그 제공자는 뛰어난 능력자라 칭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비스는 제공하는(받는) 사람에 따라, 제공하는(받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 제공하는(받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한 사람의 모습이 조직 전체의 모습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무서움도 있다.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만족하고 누구는 불만족하고, 또 같은 직원의 서비스에도 만족과 불만족이 있기에 정답을 찾기는 어려운 분야이다. 
결국 정해진 매뉴얼이 있어도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휴먼웨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이질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질성을 갖고 있는 무형의 서비스에 목을 매는 이유는 한번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비스가 보시되지 않는다면 마치 다시 처음인 것처럼 다시 제공되긴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이미 제공된 서비스는 되돌리기 어려 울 뿐 더러 제공 즉시 사라지므로 그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딱 꼬집어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은 정답이 없다는 것 아닐까?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내가 기억하는 서비스의 변천사는 대략 이렇다.

[덤]에 가까웠던 서비스에서 [고객은 왕이다] 라는 비정상적인 서비스 통념이 생기면서 돈을 내는 쪽이 “갑”이 되는 비상식적인 기사거리도 많이 있었다. (물론 아직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 힘든 시기를 지나오니 [고객 감동 서비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이젠 “감동”까지 선사해야 하는 무형의 서비스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감동서비스의 문제는 일방적인 서비스형태로만 이어져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는 그 어디에도 없어 직원들이 지쳐 떨어져나가는 직원 난(難)이라는 당연한 결과치를 얻었다.

이 시기도 지나고 그야말로 서비스의 최고봉이라는 [감성서비스] 시대에 도래했다.

감성이라...? 아무리 서비스가 무형이라지만 정말 답이 없는 가상의 서비스인 것이다.

요즘은 모든 매체마다 그야말로 서비스 전쟁이다.

모든 기업이 처음부터 완벽한 서비스 제공을 실현했다기보다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사업을 진행하면서 감성을 입혔을 것이다, 처음부터 감성을 자극하는 서비스는 그들 조차 상상도 못했을 거란 얘기다.

온순한 민족성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민국에 서비스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는 기업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대표 두 항공사인데 요즘은 그 명성을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들이 민 낯이 적날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기업에서 고객만을 위한 서비스를 수십 년 간 해오다 보니, 정작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원들을 기계의 소모품처럼 만들어 버렸다.

갑을 관계보다 더 심한 소모품 취급관계에서 서비스는 절대 능동적일 수 없다, 그런 고충을 알기에 수동적인 서비스 제공이 노출되어도 그들을 욕 하기가 쉽지 않다, 
제발 기업에서는 생각의 전환이란 것을 좀 해주셨으면 한다.

좋은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정당히 지불할 때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착취”는 사라질 것이다.

기업의 보여지는 이미지로 얻어지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관계든, 업무적인 것이든, 혹은 기업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끝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만족스러운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서비스를 받아들일 준비도 안되어 있는 상태로 본인도 모르게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무대 한 가운데 놓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쨌거나 처음에 환대를 받다가 마지막에 불편한 관계가 되어 버리면 배신감, 실망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반대로 처음엔 감흥이 없다가도 마지막에 감동을 받으면 역전되는 감정에 상대에 대한 신뢰도는 급격하게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끝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된 심리 연구결과라 볼 수 있겠다.)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시간 순으로 차곡차곡 쌓아두지 않고 가장 마지막의 경험을 뚜렷하게 기억하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심리 연구 결과를 이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소위 “해피콜” 이라는 만족도 조사가 서비스 종료 후에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인사라면 첫 인사보다는 끝 인사를 더 따뜻하게 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새내기 담당자가 내게 서류를 건넸을 때 요목조목 수수료 안내를 하기 이전에 그 동안 타이밍을 놓쳐 미처 하지 못한 사과를 정중하게 해줬더라면, 비록 그 조직은 맘에 들지 않더라도 그 담당자에 대한 평가는 나아졌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평가나 기업서비스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에 한다.

 

[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이런 마지막 힘에 포커스를 맞춰 서비스 교육을 반복한다면 감성과 공감의 서비스 트랜드 시대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활용성이 아주 좋은 교육이론이라 생각된다.
(비록 그 교육이 속성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요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거론되고 있는 BMW차량 화재. 

이미 문제는 발생되었고 알고 있다시피 현재는 문제 해결에 주력할 때이다, 물론 생명과 직결되는 예민한 부분의 문제라 문제 해결을 하는 과정중의 서비스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기업의 책임자라면 문제 해결 후 고객 After-service 서비스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차를 판매할 때는 간이라도 내 줄 것처럼 했는데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의 문제가 터진 지금 쌩~~하게 외면해 버리는 차가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두 번 다시 그 회사와의 거래는 없을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 응대하는 부분 아닐까 싶다.

여기서 서비스 능력자의 노하우가 발휘되는데 풍부한 감정의 경험치로 고객의 만족감을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비스의 질은 곧 고객이 느끼는 감정이다, 고객의 입장에서 철저히 관찰하고 분석해서 현장에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관공서의 서비스는 이 부분에서 개선할 점이 태산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방문한 주민센터만 서비스교육 제공 기회에서 번번히 누락된 건가? 모를 일이다.) 

서비스란 것에는 사소한 것이 없어야 한다. 고객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음을 기본으로 하고 고객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 시킬 것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 고민 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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