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대한항공 위기 속 1주기 추모식
“쇼 하지 않는다, 한우물 파야” 유훈

지난 2011년 5월24일(현지시간) 프랑스 툴루즈 에어버스 본사에서 열린 초대형 항공기 A380 1호기를 인수식에서 조양호 회장이 조종석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대한항공 제공
지난 2011년 5월24일(현지시간) 프랑스 툴루즈 에어버스 본사에서 열린 초대형 항공기 A380 1호기를 인수식에서 조양호 회장이 조종석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대한항공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이 결코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도약을 향한 도전정신과 실천 의지가 꺾이거나 약화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일우(一宇)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생전 대한항공이 장기적 안목으로 변화에 대비하는 변화지향 경영을 추진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일우는 일에 대한 타이밍과 중장기적으로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대한항공은 의사결정 당시에는 의구심을 자아내던 투자나 공격적인 경영이 결국 새로운 활로로 다가와 대한항공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내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대한항공에 발을 들여놓던 1974년은 제1차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때였다. 1978년부터 제2차 오일쇼크가 닥치자 항공사 비용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연료비 부담이 4배까지 늘어났다. 이때 정석(靜石) 조중훈 창업 회장은 줄일 수 있는 원가는 줄이되, 시설과 장비 가동률은 오히려 높였다. 항공기 구매도 계획대로 진행했다. 불황에 호황을 대비하는 전술이었다. 이는 오일쇼크 이후 새로운 기회로 떠오른 중동수요 확보와 신규 노선 진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위기에 강한 선친의 이러한 사업가적 기질을 이어받은 일우는 장기적 안목으로 경영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처했다. 특히 항공기의 활용과 구매 시점에 있어 탁월한 혜안을 발휘했다. 외환위기 때에는 보유 항공기를 매각 후 임차하는 방식으로 유동성 위기에 대처했고, B737-800 항공기와 B737-900 항공기 27대의 구매계약을 체결하는 역발상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미국 보잉은 대량 구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계약금을 줄여 주고, 항공기 구입에 필요한 금융을 유리한 조건으로 주선까지 해주었다. 대한항공으로서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본 것이었다.

이라크전쟁과 사스(SARS), 그리고 9‧11 테러의 영향으로 세계 항공운송산업이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2003년에도 A380과 B777-300ER 등 차세대 항공기들의 대량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미래의 항공 수요와 시장 판도를 분석해 내린 과감한 결정이었다. 고유가 사태와 환경 문제가 대두될 것으로 내다보고 차세대 항공기의 경제성과 연료 효율성과 친환경적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그의 예견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적기에 항공기를 들여올 수 있었으며,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를 강화했으며, 해외 수요 유치를 통해 더 멀리 날아오를 수 있었다. 원화가치 하락으로 한국시장이 침체하자 해외지역 마케팅을 강화하고 연결 스케줄을 개선해 환승 수요 유치에 집중했다. 그 결과 대한항공은 여느 항공사보다 빠르게 위기를 극복했고, 2010년 사상 최대 실적을 내며 글로벌 선도 항공사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다.

1990년대 말 연이은 사고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세계 항공업계가 항공동맹체로 재편되는 변화의 흐름을 읽고 글로벌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 창설을 주도했다. 대한항공은 이를 통해 국제 무대에서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2018년에는 델타항공과의 태평양 노선 조인트벤처를 이끌어 냄으로써 보다 강력한 협력관계를 통해 견고한 실적을 내며, 대한항공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일우는 변화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실한 과제로 보았다. 변화에 둔감해 타성과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치열한 국제 경쟁에서 뒤처진다며 능동적인 변화를 주창했다. 이러한 변화지향 경영철학은 바람직한 인재의 모습으로 ‘진취적 성향의 소유자’와 ‘Innovative Excellence’로 둔 것에도 잘 드러나 있다. 세계를 넘나드는 글로벌 선도 항공사의 구성원으로서 늘 깨어있는 젊은 사고와 자기계발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선도해 나가기를 바랐다.

정석은 오로지 수송에만 전념하는 수송 외길을 걸었다. 남의 흉내를 내는 모방은 싫어했으며, 모르는 사업은 하지 않고 잘 아는 수송에만 집중하며 한진그룹을 이끌었다. 이와 같은 ‘선택과 집중’의 사업 원칙은 한진그룹의 핵심 경영기조로 자리잡고 있다.

일우는 수성(守成)에 성공한 항공 전문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싶어 했다. 사업을 다각화하기보다 ‘수송보국’의 창업정신을 계승하고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대한항공이 외환위기, 9‧11 테러, 고유가 등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항공사로 우뚝 선 것은 ‘수송’을 기업의 핵심가치로 선택과 집중을 추구한 그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엔지니어로 출발한 그는 대한항공의 모든 부분을 섭렵하며 항공 전문가로서 이력을 쌓았다. 남가주대(USC) MBA, 인하대학교 경영학 박사에 이어 하버드대 고급관리자 과정,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 과정 등 실무에 이어 이론까지 겸비했다.

특히 항공 전문가로서의 식견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비와 자재를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조종 훈련을 받아 항공 기술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사소한 정비 결함이나 조종 실수 등 상당한 경력의 전문가들도 놓치는 문제점을 직접 찾아낼 정도였다. 항공기를 구매할 때도 항공기의 장단점을 헤아려 판단할 수 있을 만큼 항공기에 대해 해박했다.

일우는 전 세계 항공업계에서 전문적인 식견을 인정받으며 폭넓게 활동했다. 항공업계의 UN이라 불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집행위원을 1996년부터 19년 동안 맡았으며, 2014년부터는 전략정책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IATA의 주요 정책 수립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계 항공운송산업계에서 일우의 위상은 2019년 6월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항공업계의 UN 총회’라 불리는 IATA 연차총회를 개최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대한항공 창립 50주년이자, IATA 가입 3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에 개최된 2019년 IATA 연차총회는 세계 항공운송업계의 트렌드를 바꾸는 중요한 글로벌 이벤트인 동시에, 우리나라의 국격을 한층 더 높인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제 경영철학 중 하나는 ‘쇼(show)’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효과가 없더라도 결국엔 ‘한 우물을 판’ 기업들이 가치를 인정받겠지요. 기업사를 되짚어 봐도 그렇고요.”

그가 말하는 한우물 경영론이었다.

오는 8일은 일우가 세상을 떠난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항공노선 운항 중단으로 한진그룹의 주력기업인 대한항공은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다. 별세 직후부터 이어지고 있는 자식들간 경영권 분쟁도 여전히 불안요소다. 이에 한진그룹은 고인에 대한 별도의 추모행사는 계획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대신 일우가 남겨놓은 위기극복 방안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실천하는 노하우를 전파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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