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미국 재계 주인공 (1)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⑨
기술·생산 이어 ‘디자인’ 강조…‘보르도TV’로 성과
매년 1500여종 TV 신제품 투입하면서도 이익 내
시스템 반도체 성공 방법은 이미 터득, 투자 가속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지난 6월 19일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미팅을 갖고 격려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지난 6월 19일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미팅을 갖고 격려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2000년대 중반, 삼성전자 텔레비전 부문 임원들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각종 최신 기술을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성 TV는 시장에서 약세를 면치 못했다. 당시 삼성 TV의 외관은 핵심 경쟁사 소니(Sony)를 비롯한 타사 제품들과 흡사했다. 모든 TV 수상기는 새로운 특장들(features)을 선전하는 스티커들로 뒤덮여 있었고, 전시용 제품에서 내뿜는 푸른빛이 매장을 가득 채웠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TV 생산업체들이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한결 같았다.

‘TV도 전자제품의 하나일 뿐입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삼성전자 고위 경영진은 이 메시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걸 명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아차렸다. 소비자들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소비자들은 끝도 없는 공학 발전 퍼레이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를 처음부터 재구성하기 하고 최초의 질문을 바꿨다.

‘가정에서 TV라는 현상은 무엇일까?’

인문과학 분야의 분석가들을 팀으로 구성하여, 관찰 데이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TV를 거실 구석에 둔다. TV를 사는 일에 여성들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TV 외관이 예쁘지 않다는 불만이 있다. 소비자들은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을 매력적인 물건을 집에 두고 싶어했다. 여기에는 TV도 포함된다.

마침내 통찰이 찾아왔다. 팀원들은 확신의 순간을 맞이했다. TV는 기술의 집약체지만, 가정에서는 다른 역할도 수행한다. ‘TV는 가구의 일종이다!’

▷디자인 경영으로 터득한 관점의 전환

이런 결과를 도출하는 데에는 삼성전자의 디자인 경영이 바탕이 됐다. 1996년 삼성전자는 디자인 혁명의 첫 해로 선언했다.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디자인을 비롯한 창조적인 역량에 있다. 21세기의 최종 승자는 그 능력으로 결정될 것이다”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의지에 따라, 기술력과 공정의 효율성에 집착해온 삼성전자는 ‘디자인’ 역량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샌프란시스코와 런던, 로스엔젤레스, 중국, 밀라노 든 선 세계 주요 도시에 글로벌 디자인 센터(Global Design Center)를 설립하고, 각 지역 라이프스타일의 흐름을 읽었다.

삼성전자 디자이너들은 이런 궁금증을 출기 위해 실제로 소비자들의 가정까지 방문했다. 그들이 제품을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 살펴봤고, 이후 관찰 결과와 연관된 기업 활동을 강화했다. 사용자를 이해하려면 디자인 연구소 차원에서 가정의 실내장식, 가구, 패션 등의 흐름을 조사하고, 그런 분위기를 제품 개발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구입해 집에 설치하고 싶을 만한 화려하고, 얇고, 조각작품 같은 독특한 가구와 같은 TV를 만들겠다는 삼성전자 개발팀이 탄생시킨 초기 성공작은 2007년 출시한 ‘보르도 TV’였다.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지역을 이름으로 정했고, 아래 부분이 곡선으로 된 것이 마치 와인잔을 연상시켰지만, 실제로는 한옥의 처마곡선 비율을 측정해 이를 적용한 것이었다. 보르도 TV는 출시 첫 해에 100만 대 이상 판매한 최초의 TV 모델이 됐다. 또한 보르도TV를 통해 삼성전자는 소니 등 경쟁사들과 차별화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TV 시장 1위를 차지했다.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도 이익을 내다

디자인과 함께 삼성전자만 갖고 있는 경쟁력은 ‘다품종 소량 생산’을 추구하면서 경쟁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이익을 내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1년에 1000~1500여 종의 TV 신모델을 생산해 시장에 투입한다. 휴대전화도 동종업계에서 매년 가장 많은 신모델을 출시한다. 단순히 계산하면 TV 신모델 1종 당 평균 판매량은 3만4000여대에 불과해 생각보다 적다. 매년 두 자리 수가 채 안 되는 신제품을 출시하는 일본 전자업체나 미국 애플과 전혀 다른 전술이다.

전문가들은 신모델을 내놓으려면 많은 투자가 선행돼야 하기 때문에 모델 수를 되도록 줄여 오래 판매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삼성전자 만의 독특한 개발·설계·생산 방식 덕분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즉, 삼성전자는 제품 하나하나에 요구되는 기능을 먼저 설정하고 비용이나 품질 등의 제약 조건을 감안하는 전통적인 개발 프로세스인 ‘포워드 엔지니어링’이 아닌 소비자가 원하는 성능의 제품을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에 얼마나 빨리 개발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은 자사 또는 경쟁사의 선행제품을 그대로 복사해 디자인만 바꾸는 게 아니다. 제품을 기능 단위로 분해해 그 기능이 왜 적용 됐는지, 해당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어떻게 같은 구조(메커니즘)을 갖췄는지 등을 분석한 뒤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기능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새로운 기능을 붙이거나(기능 추가) 불필요한 기능을 제거(기능 삭제)해 파생 모델을 만든다. 예를 들어, 일본의 입식소바는 동일한 메밀국수와 국물에 고객의 주문에 따라 튀김이나 고기를 넣는다. 리버스 엔지니어링도 입식소바와 같다. 공통된 플랫폼에 시장의 특성에 따라 기능을 갖춘 제품을 빠르고 저렴한 가격에 개발할 수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이용하면 기존 기술을 결합해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 부품도 자체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범용 부품을 조합해 단기간 저비용으로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서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추구한 삼성전자는 가격 경쟁력이 치열한 ‘로우 엔드 시장’은 물론 고가 프리미엄 제품이 격돌하는 ‘하이엔드 시장’까지 모두 대응할 수 있었고, 글로벌 톱의 지위에 올랐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시스템반도체 1위’ 강한 의지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파운드리 부문을 포함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업계 1위를 목표로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한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으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공황)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투자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연산과 논리 등의 정보처리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시스템반도체는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구분된다. 손톱만한 반도체에 얼마나 큰 회로를 집어넣을 수 있는지에 대한 미세화 기술과 적기에 디자인을 체적화하면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가라는 제조공정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또한 시스템반도체는 자사 소화용 물량보다는 외부 고객사의 물량을 수주해서 생산하는 위탁생산 산업이다. 회로 구성에 따라 제품의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한계가 거의 없다는 특징도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오랜 기간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진행해 왔다. 진대제, 황창규, 권오현 등 숱한 반도체 스타 최고경영자(CEO)들도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맡아 나름대로의 성과를 일궈냈다.

이러한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세계 1위를 일궈내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미국 인텔과 시스템 반도체 업계 글로벌 1위인 대만의 TSMC 등과의 경쟁에서 10년 내에 승리하겠다는 공격적인 각오다.

그동안 삼성전자가 이뤄낸 성공 경험을 제대로 융합하면 불가능한 목표는 절대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술과 경험, 이를 활용해 성공한 디스플레이 산업, TV와 휴대전화 등 완제품 제조를 통해 얻어낸 ‘소량 다품종 생산’ 노하우, 디자인 경영을 바탕으로 한 제품 창조 노하우를 결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도체는 4차산업혁명 시대에 세상을 움직이는 엔진이자 우리 미래를 열어가는 데 꼭 필요한 동력이다. 시스템반도체산업의 성공을 위해 사람과 기술에 더 적극적으로 투자하겠다.” 이 부회장의 발언 속에는 삼성의 강점을 극대화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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