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개척·외자 유치 위해 박람회·전시회 적극 활용
분단 상황도 한몫, 1973년 트리폴리박람회 동시 참가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최를 위해 공사가 진행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대지에 박람회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최를 위해 공사가 진행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대지에 박람회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Forum for Prosperity of Tomorrow).’

오로지 수출만이 살 길이던 시절인 1968년 9월 9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5만2000여 평의 대지 위에는 3만여 개의 오색풍선과 300여 마리의 비둘기 때가 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의 막이 올랐다.

박람회장 중앙에는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커다란 주판알로 쌓아올린 55m 높이의 상징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시흥과 영등포 사이에 임시 개설된 ‘박람회역’ 앞에서 입구에 이르는 벌판에는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1만여 명의 관람객들이 백색의 팔도박람회를 연출했다. 전날 남산에서는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가 펼쳐졌으며, 서울지역 전 노선에서 꽃전차가 운행됐다.

범정부적인 지원 속에 열린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는 국내에서조차 ‘국산’이라는 이름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한국 상품을 외국 바이어들에게 처음 소개하는 역사적 자리였다. 이는 또 수출증대를 위해서는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세계인의 눈앞에 우리 스스로를 알려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의 산물이었다.

총 12억 원을 쏟아 부은 42일간의 박람회 기간 중 43개국에서 1800여 명의 외국 바이어가 찾아와 홀치기 제품 등 86개 품목 2100만 달러(한화 58억8000만원) 어치의 수출계약을 맺었다. 직물류 외에 이쑤시개, 김치 통조림 등 자질구레한 품목도 수출에 한 몫을 했다. 그해 수출 목표액의 4%에 달하는 기대 이상의 계약 실적은 이후 국내외 박람회 및 전시회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당시 구로공단 일대는 비가 오면 질퍽거려서 ‘진당포’로, 날이 개면 먼지가 많이 나 ‘먼당포’로 통했다. 부지 조성작업이 부진하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행을 나와 김현옥 서울시장에게 지시해 진입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최고액 100만 원이 걸린 국내 최초의 50원짜리 즉석복권도 관람객을 끌어들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복권은 연일 매진기록을 경신했으며 27개 복권 판매소엔 관람객이 몰려들어 아우성이었다. 다소 문제점도 있었지만 2000만달러를 넘는 계약 실적은 기적에 가까웠다. 이후 국내외 전시사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 언론사는 당시 무역박람회를 평가한 기사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우리나라 상품이 박람회를 통해 세계시장에 첫 선을 보인 것은 지금부터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이 미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3년(고종 30년) 개최한 시카고 세계박람회였다. 기와집으로 된 한국관에 출품된 물품은 조복, 돗자리, 저포(모시), 궁시(활과 화살), 가마, 갑옷 등 고작 6개 품목이 전부였다.

이후 정부의 박람회 참가는 한동안 뜸하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필리핀 국제박람회를 시작으로 1962년까지 10년간 모두 50차례에 걸쳐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초창기 국제 박람회 참가는 ‘우리도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는 대외 과시용인 동시에 체면치레적인 성향이 강했다. 현장거래를 통한 상품 판매는 엄두도 못 냈으며 해외시장 개척을 기대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업체들은 자기네 상품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으며, 관청의 출품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자리나 메우는 식이었다. 기껏 항공료를 대주며 데리고 나가면 호텔방에 상품을 늘어놓고 무작정 바이어들이 오기만을 고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의 한 박람회에 참가했던 업체의 운영요원 가운데는 박람회가 끝난 뒤 귀국을 거부해 불법 잔류한 사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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