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관 설치했으나 친북 공산정권의 고관세 정책으로 진척 부진
1968년 ‘한남무역’ 설립, 대인니 시멘트 수출 전담기 창구 역할
교류 확대 이어지면서 한국의 대 아시아 국가별 수출액 3~4위
국내 기업 해외 자원개발 눈 뜨게 하는 촉매 역할 및
한국 교역시장 제3세계 비동맹국들로까지 다변화 계기 마련

1963년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경제사절단 일행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 후 항공기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3년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경제사절단 일행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 후 항공기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세안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틀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당시 국내외의 분위기도 한몫을 했다.

1973년 1월 파리 국제회의의 베트남 전쟁 종식 결의를 시작으로 2월 미·중간 연락사무소 개설 합의, 6월 닉슨과 브레즈네프간 미·소 정상회담, 9월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등이 연이어 벌어지면서 세계는 바야흐로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하는 시대로 치닫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그해 6월 박 대통령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골자로 한 ‘6.23 평화통일 외교선언’을 발표, 제3세계의 공략에 나섰다.

◆통상관계 진전이 국교수립 이어져

한·인도네시아간 국교 수립에는 이 같은 국내외 정세 외에 양국간 통상관계의 진전 또한 큰 몫을 했다. 대사급 수교가 이루어지기 9년 전인 1964년 7월 당시 김동조 코트라(KOTRA) 사장과 인도네시아의 바스룰 자말 무역부 차관 간에 양국간 무역증진 문제가 논의돼 같은 해 11월 1일 코트라의 8번째 해외무역관으로 자카르타 무역관이 개설됐다.

무역관 개설까지는 이뤄졌으나 곧바로 양국간 교역이 활기를 띨 만큼 여건이 조성돼 있지는 못했다. 무역관 개설과 더불어 현지에 도착한 무역관 전시상품조차 인도네시아의 고관세 정책으로 해가 바뀌도록 통관이 되지 못했고,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도 영토통합, 정치적인 정통성 확보라는 다급한 문제 때문에 경제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65년 9월 인도네시아의 친공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친 서방 노선의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한 다음해인 1969년 인도네시아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면서 양국간 교역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69년 남양어망 등 어망업체들이 종전까지 일본업체들의 독무대였던 인도네시아의 어망시장에 본격 진출했고 시멘트 수출도 활발해졌다. 당시 김우중씨(전 대우그룹 회장)가 무역부장으로 있던 한성실업 등을 중심으로 섬유업체들이 싱가포르로 수출한 트리코트지의 90% 정도가 인도네시아로 밀수 형태로 재수출됐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68년에는 주로 인도네시아와의 교역확대에 초점을 맞춰 대형 무역업체 5개가 공동 출자한 ‘한남무역’이 설립됐다. 1970년 3월 서울 강변3로에서 피살체로 발견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인숙 여인의 큰오빠인 정 모 씨가 당시 초대 자카르타 지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한남무역은 1973년 쌍용그룹에 흡수 합병될 때까지 대인도네시아 시멘트 수출의 길을 텄다. 코트라는 1970년 자카르타의 중심가에 있는 사리나 백화점에서 한국 상품 종합전시회와 함께 바자회를 열어 약 100만 루피의 판매 수입금을 영토 통합자금으로 인도네시아 정부에 기부해 현지 언론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와의 국교가 수립되면서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대인도네시아 수출은 급증하기 시작했다. 1967년 120만 달러, 1969년 195만7000달러에 불과했던 대인도네시아 수출은 수교가 실현된 1973년에는 3238만 달러로 급증해 우리나라의 10대 수출시장으로 부상했으며, 1974년에는 수출규모가 5518만 달러로 늘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을 제치고 일본, 홍콩에 이어 대만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아시아 수출 랭킹 3~4위를 다투게 됐다.

◆수교 통해 해외자원 개발 눈떠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 있는 점은 인도네시아와의 수교를 통해 우리 기업인들이 해외 자원개발에 눈을 뜨게 하는 촉매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교역시장을 제3세계 비동맹국들로까지 다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와의 수교는 우리 수출사에 또 하나의 개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나라와의 초창기 통상확대는 교역을 통해 먼저 경제적으로 진출, 국교 수립의 길을 닦는 중요한 선례가 됐다.

이 같은 방식은 동구권, 소련, 중국 등 북방권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에서도 그대로 답습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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