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CJ‧새한‧신세계 등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오른쪽)와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한솔그룹 제공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오른쪽)와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한솔그룹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25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별세로 파란만장 했던 삼성 오너 2세 일가의 경영시대도 막을 내렸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박두을 여사 슬하에 3남 5녀를 뒀고, 이중 계열 분리해 삼성으로부터 독립한 자녀는 장녀 고(故) 이인희씨(한솔)과 장남 고 이맹희씨(CJ), 차남 고 이창희(새한), 오녀 이명희씨(신세계) 등이다. 차녀 이숙희씨는 LG구인회 회장가로 출가했고, 삼녀 이순희씨는 대학교수와 결혼해 기업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이지만 오너가의 삶은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오너 2대에서 벌어진 부친과 동생, 동생들끼리의 갈등과 반목,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자식 등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도 많았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범 삼성가’의 정신적 지주

청초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1929년 1월 30일 호암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 박두을 여사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나 정확히 만으로 90살 생일인 2019년 1월 30일 별세했다. 그의 삶은 범 삼성가의 정신적 지주, 생의 마지막까지 가족들 간 인연을 이어준 구심점 역할로 대변할 수 있다.

대구여중과 경북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가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8년에 조운해 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과 혼인한 뒤 학교를 중퇴하고, 조동혁(한솔케미칼 회장)·동만(전 한솔그룹 부회장)·동길(한솔그룹 회장)·옥형·자형 등 3남2녀를 낳아 가사에 전념했다.

경영인으로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79년 호암이 한국에서도 내세울 수 있는 호텔을 만들겠다며 정부로부터 인수한 호텔신라 상임고문에 선임되면서부터다. 서울 신라호텔 전관 개보수 작업 및 제주신라호텔 건립 등을 훌륭히 마무리해 수완을 인정받았다. 그때의 경험으로 이 고문은 호텔·리조트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한솔그룹을 이끌며 오크밸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 고문은 200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을 살면서 창작의 기쁨을 느낀 적이 정확히 세 번 있다. 선친께서 세웠던 서울 신라호텔을 맡았을 때, 나의 생각을 녹여 제주신라호텔을 만들었을 때, 그리고 오크밸리를 만들고 키워 나가는 바로 지금”이라고 말할 정도로 호텔·리조트 사업에 많은 애착을 보였다.

1983년에는 한솔그룹의 모태가 된 전주제지 고문에 취임했다. 전주제지는 호암이 제지사업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것과 더불어 제조업 기반이 취약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라도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설립한 기업이었다. 이 고문은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제지회사로 도약시켰다.

이 고문은 어릴 적부터 남자 못지않은 배포와 섬세함까지 갖춰 부친을 빼닮았다는 평가를 많이 들었다. 이 때문에 호암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호암은 골프 라운딩을 할 때 마다 이 고문을 데리고 다니며 인맥을 넓혀주고 경영에 관한 조언도 해 줬다. 삼성그룹 승계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호암이 이 고문을 두고 “쟤가 아들이라면 내가 지금 무슨 근심 걱정이겠나”라고 수시로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편 조 전 이사장도 회고록에서 부인이 “수완이 탁월하고 사업가적 재질이 뛰어난 전형적인 삼성가 출신”이라고 평가했다.

◆이맹희 CJ 명예회장 ‘비운의 황태자’

장남 이맹희 CJ 명예회장은 삼성전자 경영권 승계 직전까지 갔다가 부친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1931년 6월 20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난 이맹희 명예회장은 중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도쿄 농업대학과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농업학을 공부했고 미시간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한일은행에 입행했다가 1962년 안국화재로 직장을 옮겼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인해 호암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부친을 대신해 삼성그룹 회장을 대행하기도 했다.

1968년 삼성물산 부사장, 삼성전자 부사장,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사장, 미풍산업 부사장, 성균관대학재단 상무, 중앙일보 부사장, 삼성문화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경영 승계를 위한 과정에서 동생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이 일으킨 경영권 분쟁에 휘말려 부친의 눈 밖에 난 뒤 17개 계열사 임원에서 대부분 물러났고 후계자 구도에서도 밀려났다.

이후 대구와 부산 경영과는 거리를 두고 지내다가 제일비료를 설립해 재기를 꿈꿨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 총수에 오른 뒤 1991년 장손 이재현 회장에게 제일제당을 떼어냈고, 이후 CJ그룹으로 사명을 바꿨다. 이맹희 명예회장은 이후 호암의 상속재산을 둘러싸고 이건희 회장과 법정다툼을 벌이며 갈등을 빚었으나 결국 패소했다.

폐암 2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이후 재발해 중국에서 투병생활을 이어오던 이맹희 명예회장은 2015년 8월 14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창희 새한 창업자 ‘비디오 테이프 글로벌 1위’

차남 이창희 새한그룹 창업자는 삼성그룹 역사에서 첫 ‘왕자의 난’을 일으킨 주인공으로 불린다. 이창희 창업자는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이 벌어지자 법적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삼성에 복귀한 이창희 창업자는 이맹희 명예회장이 호암의 눈 밖에 나서 후계구도에서 밀리는 틈을 타 외부 인사와 손 잡고 부친이 그룹에 복귀하면 안된다며 청와대에 관련 탄원서를 보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노한 호암은 이창희 창업자에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귀국하지 말라’며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미국에서 드문불출하던 이창희 창업자는 1967년 미국 마그네틱미디어와 합작해 창업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를 기반으로 자립을 추진했다. 1977년 귀국해 새한전자를 인수하고 1979년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의 미국 지분을 사들여 1980년 새한미디어를 출범시켰다. 1985년에는 한국종합화학으로부터 충주 비료공장을 사들여 화학 사업에도 나섰다.

새한전자를 인수한 그는 호암을 찾아가 사과하며 관계를 회복했고, 호암은 제일합섬 주식을 이창희 씨 가족에게 물려줬다.

그가 경영하던 시절 새한그룹은 VHS 비디오테이피 생산 규모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1991년 이창희 회장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뒤 아내 이영자 씨가 회장에 올라 사업을 확장했고, 1995년에는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아, 1997년 새한그룹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그해 4월 아들 이재관 씨가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그가 취임한 뒤 새한그룹은 신규 투자마다 실패를 거듭했고 주력사업인 비디오테이프와 섬유산업에서도 퇴보하면서 어려움을 거듭하다가 2000년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그룹은 해체됐다.

◆이명희 회장 ‘독립 후 가장 성공한 삼성가 기업인’

호암의 막내 딸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기업을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3년 9월 5일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이명희 회장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를 졸업했다.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과 결혼한 뒤 한동안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담당 이사로 입사해 경영일선에 나섰다. 상무, 부사장으로 있다가 1997년 신세계그룹이 독립하면서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2년 후에는 회장에 올랐다.

유통사업에 그룹의 역량을 집중해 신세계를 백화점부문 2위로 올려놨고 대형마트부문에서도 이마트를 대형마트 1위로 만들었다.

활달하고 통큰 리더라는 평가와 함께 전문경영인에게 책임경영을 맡기는 등 자율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이명희 회장은 70에도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9월 이명희 회장이 이마트와 신세계 보유 지분 중 일부를 자녀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에게 각각 증여하며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