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TV 덤핑서 시작, 지식재산권 협상으로 절정
앨범 제소 땐 학생데모에 ‘양키 고 홈’ 구호 등장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지난 1985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둔 서울의 거리에는 느닷없이 사진 앨범 좌판들이 늘어섰다.
종로, 명동, 광화문 지하도, 심지어 대학교의 정문 앞에서도 이들 앨범 좌판은 장사진을 쳤다. “미국에서 덤핑제소 받은 앨범업계를 도웁시다”라고 쓴 휘장을 걸어놓고 장사꾼들은 “자! 이것이 미국에서 덤핑 때린 바로 그 앨범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조금씩 도웁시다”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학생들까지 가세한 이 가두판매에서 어떤 행상은 하루 평균 200만 원어치를 팔아 한철에 100만 원의 순이익을 올리는 호황을 누렸다고 허풍을 떨기도 했다.
앨범 행상 못지않게 대목을 맞은 사람들이 미국 변호사들이었다. 한국 상품에 대한 덤핑 및 상계관세 제소가 잇따르자 많은 미국 변호사들이 사건을 맡겠다고 로비활동까지 벌였다. 당시 상공부에 재직했던 공무원들은 미국 변호사들이 여러 통로를 동원해 한국 관계 일을 맡겠다고 청을 넣는 바람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고 술회할 정도다. 그해 한국은 16명의 미국 변호사를 고용하고 350만 달러의 수임료를 지불했다. 특히 앨범 사건 하나에만 40만9000달러의 변호사 비용이 청구됐고 이를 에누리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미국 변호사들과 로비스트들은 워싱턴,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있는 코트라(KOTRA) 무역관의 문을 쉬지 않고 두드렸다. 이들은 한국 내에서의 세일즈 기반 확보를 위해 자비 여행에 무료강연도 제의해 왔다. 1988년 미국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마이클 듀커키스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영세한 중소기업들이 수출했던 앨범은 굵직굵직한 재벌들이 수출했던 컬러TV의 반덤핑제소 사건 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그해 12월 8개 공장이 문을 닫고 16개 업체의 가동률이 60% 이하로 떨어졌다. 1000여 명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6.25 전쟁 이후 국민에게 고마운 나라로만 알려졌던 미국이 그해 겨울의 추위만큼이나 ‘인정도 사정도 없는 제국주의자’로 전락했다. 학생 데모대들이 처음으로 “양키 고 홈!”을 외친 것도 이 무렵이다. 전통적인 우방으로 심지어 ‘혈맹’으로까지 묘사됐던 미국과의 관계에 본격적인 통상마찰의 파도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1982년 대미무역수지가 사상 처음 흑자로 돌아서 그 규모가 1억6300만 달러에 달하고 그 이듬해에는 18억5300만 달러로 늘어났다. 그러자 1983년 한·미 간 최초의 통상마찰로 기록된 컬러TV 덤핑제소가 벌어졌다. 당시 컬러TV 생산량의 99%를 미국에 수출하던 국내업계는 초비상이 걸렸다. 전자공업진흥회(현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를 중심으로 민·관 합동 대책반이 설치됐으나 변호사 고용을 둘러싸고 가전 3사간에 의견이 달라 결국 각사별로 다른 미국 변호사 4명이 고용됐다. 업체마다 자사의 영업비밀이 흘러나간다는 이유로 공동변호사 선임을 반대한 것이다. 당시 협상을 맡았던 상공자원부 관계자는 “결국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이들 3사는 사사건건 이견을 보여 애를 먹였다”라면서 “3사는 자사에만 낮은 덤핑 마진율이 나오면 그만이라는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해 전혀 협조가 되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미국 상무부의 조사관들도 악명을 떨쳤다. 1983년 10월 데이비드 채프먼이라는 미 상무부 조사관이 보좌관 2명을 이끌고 서울에 왔다. 그는 서울에 머문 13일간 일체의 향응을 거절하고 조사를 위해 방문한 업체에서는 서류를 집어 던지는 무례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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