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가 참 모호하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오너 일가친척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일까.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속한 3자연합간 그룹 경영권 분쟁이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발표로 불길이 되살아난 가운데 메리츠증권이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행동주의 사모펀드(PEF) KCGI의 종속회사인 그레이스홀딩스는 지난 12일 메리츠증권과 한진칼 550만 주(지분율 9.04%)를 담보로 한 대출 계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그레이스 홀딩스는 1300억 원을 대출받았다.

언론은 이 돈의 사용 용도에 대해 KCGI 측의 의견을 받아 한진칼이 발행한 신주인수권(워런트)을 사놓은 것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고 유상증자 등으로 회사에 돈을 넣어줄 상황이 생길까 봐 현금을 미리 마련해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메리츠증권의 설명은 다르다. 메리츠증권 측은 이번 대출은 2019년 대출 건에 대한 차환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KCGI에게 이미 대출을 해줬고, 이번에 KCGI가 주식을 담보로 제공해 받은 대출금으로 지난해 빌린 돈을 갚았다는 것이다. 메리츠증권의 설명대로라면 KCGI가 주식 담보대출을 통해 얻은 현금은 없는 셈이다.

메리츠증권은 메리츠금융지주의 자회사로, 그룹을 이끄는 조정호 회장은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4남이며,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의 셋째 작은아버지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해 KCGI가 조원태 회장 측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을 때 한진칼 주식 매입한 자금 중 일정 수준은 메리츠증권으로부터 대출한 돈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 KCGI가 메리츠증권으로부터 어떠한 방식으로 얼마의 돈을 대출받았는지에 대해, 또한 사용처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어쨌건, 주식담보 대출 승인으로 KCGI는 550만 주의 한진칼 주식의 소유권은 유지하고 있지만, 대출 기간인 오는 2021년 11월 12일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해당 주식은 메리츠증권은 넘어갈 수 있다.

조정호 회장도 중립을 지킨다고 밝힌 바 있고, 이번 주식 담보대출 승인도 객관적인 수익성을 검토하는 등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졌기 때문에 KCGI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메리츠증권은 전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매우 급한 시기에 메리츠증권이 등장한 것에 대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을 낳고 있다. 무엇보다 조정호 회장의 과거를 짚어봐도 말이다.

조정호 회장은 십수 년에 걸친 범한진가 오너 2세 형제간 갈등에 참여한 장본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조중훈 회장의 별세 후 4형제는 장남인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3남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과 2남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과 4남 조정호 회장 등으로 나뉘어 갈등을 벌여왔다. 조양호 회장과 조남호 회장 간 다툼이 부각 되었으나 조정호 회장은 늘 조남호 회장의 편이었다. 이러한 다툼은 조양호 회장의 별세까지 지속되었다.

재계에서는 큰형의 별세로 앙금이 완전히 지워졌을까에 대해서는 지금도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조원태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할 때에도 조남호‧조정호 두 작은아버지가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다행히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보였다. 한진중공업 조선 부문 경영권을 채권단에 넘기면서 조남호 회장의 세가 위축됐던 것이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 메리츠증권이 KCGI에 대출을 해줬다는 사실은 회사가 내세운 객관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다.

3자연합은 어떻게 해서라도 산업은행과 한진그룹이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막아야 한다. 표 대결로는 유리했던 상황이 급반전한 현재로서는 한진그룹 경영권을 잡기 위한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9%가 넘는 한진칼 주식을 KCGI로부터 담보로 받은 조정호 회장은 어찌 됐건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에 관여하는 모양새가 됐다.

그의 의중이 어떤 것인지는 당장 알 수 없다. 하지만 꽃놀이패를 쥔 것은 확실해 보인다. 3자연합이 어떻게 해서든지 표 대결에서 승리해 경영권을 확보한다면 이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요, 조원태 회장 측이 승리해 3자연합이 물러난다면서 담보로 제공한 주식을 넘기면 조정호 회장의 메리츠증권은 한진칼의 주요 주주가 될 수 있다. 경영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이다.

조정호 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KCGI가 제기한 한진칼 제3자 배정 유상증자 결의에 대해 신주발행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판결과 산업은행의 한진칼 유상증자 납입일인 다음 달 2일까지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자칫 KCGI의 한진 오너 일가의 갈등이 2대와 3대간 다툼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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