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흑자와 통상협상 (상)
1986년 GATT 각료회의 개최지 서울이 가장 유력
당시 정부가 “아시안게임과 중복된다”며 거절

전국농민대표 500여 명이 1990년 8월 13일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관에서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 대응 결의대회’를 갖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전국농민대표 500여 명이 1990년 8월 13일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관에서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 대응 결의대회’를 갖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지금은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통상용어가 FTA(자유무역협정)과 도하개발아젠다(DDA)지만, 사실 이보다 더 큰 충격을 던져준 단어는 바로 ‘우루과이라운드(UR)’였다. 하지만 우루과이라운드의 명칭이 ‘서울라운드(SR)’가 될 뻔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난 1986년 9월에 열린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각료회의는 당초 서울이 가장 유력한 개최지로 꼽혔다. 그러나 당시 우리 정부는 같은 달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이 회의의 개최를 거절, 결국 우루과이의 휴양도시 푼타델에스테에서 열렸고 그 이름도 ‘우루과이라운드’가 됐다.

한국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던 아시아의 한 모범적인 개발도상국으로 선진국 시장에서 특혜관세 등의 혜택을 받으며 순항을 거듭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통상마찰이라는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대미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는 등 수출의 급신장이 세계 각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서울이 우루과이라운드를 출범시킨 GATT 각료회의 개최를 위한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까지 등장했던 것이다.

◆1984년 통상장관회담만 30회 열려

세계 각국의 통상장관들이 수시로 서울에 날아와 회담을 벌였고 한국의 통상 당국자들은 한해에도 수십 차례씩 외국을 드나들며 협상 전선에 나서야 했다. 1982년 5월 상공부 장관에 취임한 고 김동휘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1년여 사이에 5번의 해외 출장을 가야 했다. 출장기간 동안 그는 네 차례의 국제기구회의 참석과 세 차례의 통상장관회담을 치렀다. 1983년 8월,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출장길에 나선 김 장관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각각 통상장관회담을 1주일간 가졌다.

제12차 한·일 각료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시드니에서 곧바로 도쿄로 날아온 김 장관은 당시 우노 소스케 일본 통산상을 상대로 별도의 통상장관회담 설치를 위한 끈질긴 설득작전에 들어갔다. 이들 간의 개별회담이 길어져 전체회의가 2시간이나 연기되기도 했다.

김 장관의 끈기는 그날 저녁의 일본 외상 주최 만찬장에서, 그 다음날 우리측 주최 오찬장에서, 어떤 때는 회의장 복도에서도 이어졌다. 이를 통해 김 장관은 일본측이 그토록 완강히 반대하던 양국 통상장관회담의 개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고야 말았다.

김 장관은 그러나 귀국 날 아침 실무자로부터 회의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코피를 흘려 회의 자료를 모두 적시고 말았다. 보고를 위해 참석했던 실무자들은 “내가 너무 무리했는가 보지”라고 말하는 김 장관의 모습을 보면서 측은함을 느꼈다는 후문이다.

미국이 한국산 컬러TV에 대한 반덤핑제소, 농산물 시장개방 요구, 보험시장 개방, 지적재산권 보호를 위한 미 통상법 301조 발동 위협 등 통상압력의 도를 높여가면서 통상 당국자들은 더욱 바빠졌다.

더욱이 미국의 이 같은 분위기가 EC(유럽공동체, 현 유럽연합) 국가들에까지 확산되고 국내에서도 당시 미국과 일본에 편중됐던 수출시장의 다변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통상장관회담은 1984년 한 해에만 30회가 열리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81년 이후 한 해 동안 통상장관회담이 20회 이상 열렸던 해만도 절반이 넘는 7년이나 된다. 이 기간 중에 열렸던 통상장관회담은 모두 213회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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