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석
채명석

“늘 남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삶을 사셨다. 임종을 앞두고도 다른 사람들이 힘들지 않게 모든 장례절차는 당신이 조금씩 모은 쌈짓돈으로 소박하게 치러주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셨다.”

2016년 12월 15일 정석(靜石)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자의 부인으로, 한진그룹의 ‘대모(代母)’로 불리었던 김정일 여사가 별세한 뒤 회사 관계자는 고인을 기리며 이같이 말했다.

벌써 5년이 지났다. 장례식 이후 매년 찾아온 기일에는 한진그룹 내부에서도 가족행사로 진행될 뿐이라는 공식적인 코멘트 이외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김정일 여사에게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워낙에 범 한진가에 불어닥친 화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고인은 한진그룹의 성장을 위해 내조를 넘어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룹 성장의 발판이 되었던 베트남 전쟁 사업 때에는 남편을 따라 전장으로 건너가 현지에 건설한 김치 공장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고 굳은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대기업의 안주인이었지만, 평생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는데 ‘식사는 아내가 직접 마련해야 한다’는 신조로 손수 식사 준비를 하고 집안 청소를 직접 했으며 특히 추운 겨울에도 필요한 방에만 난방을 넣는 등 절약하는 삶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렇게 김정일 여사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4남 1녀를 키웠다. 한진그룹의 성장기에는 4형제는 아버지 아래에서 힘을 합쳐 사세를 키웠다. 가족간 우애와 화합은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2002년 남편의 별세 후 김정일 여사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며느리까지 합세하면서 4형제간 재산권 갈등이 시작되면서 형과 아우가 원수지간이 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2006년에는 그나마 형제간 갈등을 막아보고자 노력했던 3남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사망했다. 조수호 회장의 별세 이후에도 형제간 앙금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죽하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정일 여사의 소원이 형제간 화합이라고 했을까.

고인의 바람은 부친 장례식 이후 14년 만인 고인의 장례식장에 조양호‧조남호‧조정호 회장이 함께 하면서 실현됐다. 이후 형제간 표면화된 갈등은 없어진 듯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2017년 그룹 주력사업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한진해운이 파산했고, 2019년에는 차남 조남호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한진중공업 조선사업 부문을 채권단에 넘겼다.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한진해운을 빼앗긴(?) 아픔을 씻기도 전에 부인과 자식들이 잇따른 반사회적 행동이 도마 위에 오르며 그룹 경영권 유지까지 어려운 상황에 이르다 2019년 과중한 업무 부담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얻은 지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망했다.

여기까지에서 마무리가 됐으면 좋겠지만, 한진 오너일가의 갈등은 3세로 이어져 장남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장녀 조현아 전 대한항공 사장은 경영권을 두고 서로를 으르렁 대고 있다.,

사실, 대한항공과 ㈜한진을 비롯한 한진그룹 계열사들의 경쟁력은 다른 회사들에 비해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한 때는 육해공을 모두 아우르는 국내 최대 물류 전문 기업이자, 항공기를 만들고 선박을 건조하는 서비스와 제조업을 모두 성공시킨,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기업으로 각광 받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의 최대주주이자 경영권을 쥐고 있는 오너 일가의 그릇된 행동이 계속되면 아무리 내실이 좋은 기업도 경쟁력을 지속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릇된 행동이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었다면 더욱 더 그렇다. 할머니가 살아온 길과 유훈을 좀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 깨우치고 실천했더라면 지난 5년간 범 한진가의 쇠락은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지 않을까?

어쨌건 아시아나항공 합병을 통해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은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조원태 회장도 조현아 전 사장이 속한 3자연합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가 한진그룹을 이끌어나갈 적임자인지 여부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경영권 분쟁이 한창일 때 한진그룹은 느닷없이 조원태 회장의 활약상을 강조하는 보도자료를 쏟아부었다. 반대쪽들이 지적하는 그의 성과물이 없다는 지적을 막기위한 조치의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15년 넘게 한진그룹을 취재하고 바라본 기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반대쪽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한다. 적어도 부친 조양호 회장이 최고경영자(CEO)였던 시기에는 그런 내용의 홍보는 거의 없었다. 한진그룹, 대한항공은 할아버지가 화가를 그리듯 밑그림을 그리며 기틀을 다졌고, 아버지가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이 지휘자의 지휘아래 전 단원이 짜임새 있게 악기를 다루는 시스템 경영을 해왔기 때문이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많아서 정작 오너는 잘 드러나지 않는 기업. 사업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진그룹의 본 모습은 이것이었다. 조원태 회장의 한진그룹과 대한항공 등 계열사들은 이러한 전문가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을 정확히 보고 등용해야 한다. 그래야 한진그룹의 저력을 되살릴 수 있다.

그리고 제발, 할머니의 유훈을 떠올리고 더 이상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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