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재학시절 용돈 벌이를 위해 했던 아르바이트 가운데 두산주류에서 출시한 소주 신제품을 두산그룹 오너 일가와 경영진들에게 배달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1998년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선물을 보내는 경영진의 명함을 가지고 가서 상대방에게 소주 상자와 함께 전달하는 일이었는데, 두산그룹 사장 명함을 들고 간 곳 가운데 한 곳이 서울 서초구 사평대로에 소재한 KCC 본사였다. 동선에 맞춰 몇몇 배달지를 돌고 늦은 오후 시간에 도착해보니 정문에 붉은 카펫이 로비 문밖까지 깔려 있었다. 소주 상자를 들고 가는 기자를 보던 경비원이 달려와 “얼른 안 보이는 쪽으로 비켜 있으라”라고 했다. 알고 보니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이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정 명예회장의 출근 및 퇴근 시간이면 붉은 카펫이 깔린다고 하며, 이 시간에는 ‘외부인’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단다. 기자가 경험한 정 명예회장과 KCC에 대한 첫 경험은 이것이었다.

기자가 된 후 KCC그룹을 직접 출입한 적은 없지만 ‘범현대가’를 취재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정 명예회장과 KCC그룹을 접했다. 기억나는 또 다른 에피소드는 본사 구내식당에 온 정 명예회장이 뚱뚱한 직원들을 목격하더니 그들을 불러 살찌면 안 된다면서 일었다 섰다 운동을 시켰다는 것이다.

지금 세대들이 두 가지 사례를 접한다면 정 명예회장과 KCC에 대해 비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벌써 20년이 넘는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이런 문화가 이해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길 바란다.

정 명예회장은 6남 1녀인 고(故)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냇동생이다. ‘영(永)’자 항렬의 현대가 창업 1세대 중 한 명이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큰형 아산을 아버지처럼 의지했다. 돈암동에서 형제‧조카들이 함께 살던 시절 어린 정 명예회장은 조카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방에서 자는 척하다가 저녁 늦게까지 일한 아산이 돌아오면 나아가서 함께 인사를 했다고 한다.

강인한 외모에서 볼 수 있듯이 정 명예회장은 아산 못지않게 한 번 하면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소위 깡도 있고, 기운도 세고, 주먹도 야물어서 친구들 사이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산의 다른 동생과 마찬가지로 정 명예회장도 형님 사업을 도왔다. 다만, 정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에서 일하지 않았다. 군 복무를 마친 유학을 권유하는 큰 형의 제안에 유학자금을 사업 밑천 삼아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1958년 금강스레트공업을 창업해 일찌감치 독립했다.

그런 그의 이력에 1970~1970년 현대자동차 부사장이라는 단 한 줄을 남겼다. 사연이 있다. 1967년 설립한 현대차는 1975년 첫 국산 고유 모델 포니를 내놓기 전까지 미국 포드로부터 들여온 코티나를 조립해 판매했다. 현대차는 코티나를 은행에 적금이나 상호부금에 가입한 사람을 대상으로 24개월, 36개월 할부로 차를 넘겼다. 그런데 수금이 안 됐다. 연체율이 90%까지 올라가서 그냥 놔두면 회사가 망할 위기까지 처했다. 1969년 아산이 직원들이 직접 찾아가서 차를 빼앗든지 돈을 받든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회수하라고 했다. 넷째 형 정세영 현대차 사장이 정 명예회장을 불러 ‘추심’ 업무를 책임져 달라고 요청했다. 험한 일인 만큼 막냇동생의 ‘깡’을 활용해 보고자 함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나는 월급을 금강에서 받으니 급여 받지 않고 현대차를 위해 노력하겠다, 1년 만에 회수하겠다”라며 ‘해결사’ 역할을 떠맡았다. 그렇게 해서 얻음 직함이 현대차 부사장이었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고객을 찾아가 당시 돈으로 100억 원을 회수했다. 당시 현대차의 1년 매출이 70억~80억 원 할 때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성과였고, 덕분에 포니 개발자금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정 명예회장의 KCC는 범현대가 기업과의 거래와 자체적인 노력으로 사업을 개척해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드러내는 것을 워낙 싫어한 정 명예회장의 성격 덕분에 언론은 KCC를 취재하기 어려운 출입처로 여긴다. 기업에 관심이 없는 국민은 KCC와 현대그룹과의 인연을 모를 정도다.

그랬던 KCC가 전 국민의 관심을 받은 것은 2003~2004년 벌어진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 때였다. 이와 관련해선 많은 언론 보도가 있었으니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지만 시간을 되돌아보면, 당시의 사건은 현대그룹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어떻게 지켜내느냐?”라는 의문에 대해 내린 답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느냐고 생각한다. 아산을 아버지처럼 따랐던 ‘영(永)’자 항렬의 창업 1세대인 정 명예회장으로서는 가문의 시각에서 정통기업인 현대의 미래를 지켜내려고 했을 것이다.

지난달 31일 타계한 고 정 명예회장이 5일장을 마치고 3일 영면했다. 유족들의 배웅을 받은 운구행렬은 장례식장을 떠나 고인이 63년 전 창업한 KCC 사옥과 KCC건설 사옥 앞을 돈 뒤 장지인 경기도 용인 선산에 묻혔다.

현대가의 한 사람이었으나 현대와는 거리를 뒀던 정 명예회장이었지만, 그는 현대는 스스로 일으킨 KCC 이상으로 현대를 사랑했던 오너였다. 파란만장한 현대의 역사를 함께한 정 명예회장이 한국 경제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2세‧3세가 주축이 된 범현대가가 어떠한 미래를 그려나갈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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