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역협회 정기총회서 운영요강 개정
‘무역진흥‧혁신성장 위한 투자사업’ 추가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한국종합무역센터. 사진=연합뉴스 제공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한국종합무역센터. 사진=연합뉴스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중소 수출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조성한 ‘무역진흥자금’이 제정 52년 만에 처음으로 ‘기업 투자’에도 활용될 수 있게 되어 유망 스타트업 투자가 가능해졌다.

유공기관 지원 및 기업에 대한 융자와 대출을 위주로 했던 무역진흥자금 활용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정부와 민간차원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것으로, 향후 추진 방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8일 무역업계에 따르면, 한국무역협회는 지난달 24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2021년 정기총회를 개최해 KITA 무역진흥자금의 용도에 ‘무역진흥 또는 혁신성장을 위한 투자사업’을 추가하는 ‘KITA무역진흥자금’ 운영요강 개정 안건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무역진흥자금은 ▲수출유관기관 및 기업의 해외시장개척에 대한 융자사업 ▲수출기업의 수출이행을 위한 융자사업 ▲자금의 과실에 의한 무역진흥사업 ▲기타 위원회가 무역진흥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업과 함께 ▲무역진흥 또는 혁신성장을 위한 투자사업에도 사용할 수 있다.

무협은 이번 개정에 대해 글로벌 트렌드 변화에 대응하여 무역진흥자금 운용을 다변화히고, 투자방식의 지원을 통한 혁신 스타트업, 수출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 및 혁신성장을 지원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수출진흥 보혈제에서 스타트업 시드머니로

무역진흥자금은 ‘무역특계자금’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 부흥을 위해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쳤는데, 해외시장 개척을 위한 정부 예산이 부족해 지원 사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이에 1969년 1월 1일부터 상공부 장관이 정하는 품목 이외의 모든 품목을 수입할 때, 수입금액의 1%를 무협의 특수회비로 징수해 ‘무역특계자금’을 조성했다. 징수율은 수입규모가 커지면서 1974년에 0.5%로 인하되고 1980년에 다시 0.4%, 1981년에 0.3%, 1982년에 0.2% 등 단계적으로 낮춰져 1990년대에는 0.1%씩 거뒀다.

상공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는 무역특계자금 제도를 1997년 말 폐지하면서 3000억원 규모의 무역진흥기금, 즉 무역진흥자금을 새로 조성해 1998년부터는 그 운용 수익으로 무역 진흥에 직결되는 사업에 중점 지원하고 있다.

무역진흥자금의 주 사용처는 중소 수출기업에게 저리로 융자하는 것이다. 무협에 월 회비를 납입한 연도에 따라 최대 3억원까지, 연금리 2.75%로 제공하며, 2년 거치후 3년차에 4회 분할 상환한다. 융자를 받은 수출기업은 경영안정자금이나 바이어 발굴, 특허·규격인증 획득, 해외홍보, 시장조사 등 수출마케팅 자금, 수출용 원자재 구매자금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과거에는 자금 융자가 수출기업들에게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융자 위주의 지원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융자는 과거의 실적을 바탕으로 제공한다. 수익을 내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받을 수 있다. 또한 상환할 수 있다는 신용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창업 3년 미만의 초보기업이나 연구‧개발를 위주로 하는 스타트업과 벤처기업은 처음부터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모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의 틀 안에서 이들 기업 대부분은 사업자금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상대적으로 금리가 저렴했던 무역진흥자금의 매력도 낮아졌다.

◆‘과거’에서 ‘미래’로 지원정책 대변화 예고

무협이 무역진흥자금의 활용 용도의 변화를 검토한 이유다. 무협은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수출과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 스타트업과 대‧중견기업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이노브랜치’를 가동했다. 이달로 운용 1년을 맞은 무협은 스타트업 지원사업을 실질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번에 무역진흥자금 운용 요건 변경으로 이어졌다.

무협은 현재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 중인데, 일단 무협이 직접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신 스타트업 지원 기관들이 조성하는 투자 펀드에 자금을 투자하거나, 이들과 함께 펀드를 만들어 자금을 제공하고, 운용은 전문 운용사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투자 대상도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무협의 성격에 맞게 해외진출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이 일순위가 될 전망이다.

무역진흥자금을 보수적으로 활용한 핵심 이유는 지원 대상이 사업에 실패해 자금 회수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융자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트업은 생존률이 더 낮기 때문에 투자 실패율도 그만큼 높을 수 있다. 따라서 무역진흥자금을 투자 사업에 활용하면 안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열 개 스타트업 투자가 실패해도, 한 개의 스타트업이 성공한다면 이를 모두 회수하고도 남는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발상을 전환하면 더 큰 기회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협은 국내 어느 기관보다 해외 네트워크가 강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다양한 국가에서 다수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무협의 장점을 활용하면 스타트업 지원의 성공률도 그만큼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오픈 이노베이션’ 구자열 회장, 리더십 발휘할 듯

비단 무협 뿐만 아니다. 수출지원 유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기업들도 스타트업과 수출초보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을 과거 실적보다는 미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변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무역보험, 해외투자보험 및 신용보증 등의 제도를 통해 수출기업을 지원하고 있는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는 현행 제도를 투자 개념으로 변화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으며, 강남구청이나 관악구청, 인천광역시 등은 펀드를 만들어서 지역내 스타트업에 투자도 한다.

LG상사 등 종합무역상사도 중소기업 제품의 수출을 대행해주고 커미션을 받거나, 이들 기업의 제품을 사입한 뒤 차익을 남기고 해외애 판매를 주요사업으로 해오다가 최근에는 스타트업에 투자해 해외 진출을 도와준 다음 성공을 거두면 커미션이 아닌 지분을 받아 수익을 거두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무협의 스타트업 투자의 과정과 성공 여부는 결정권자의 의지 문제다. 마침 무협은 20년 만에 민간 기업가인 구자열 LS그룹 회장을 새 회장으로 선출했다.

구 회장은 “테슬라 같은 ‘디지털 엔터프라이즈’의 급부상에 대비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며,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을 강조해왔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새로운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등 외부와의 협업을 통해 혁신하는 것을 말한다. 무역진흥자금 활용 변화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스타트업 업계 관계자는 “무협의 인적‧조직적 인프라에 무역진흥자금의 투자까지 더해진다면 스타트업에게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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