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가 많기에 그 누구도 방심할 수 없는 쇼트트랙 종목
현역시절 모든 선수가 경쟁자라 한순간도 편한 적 없어
올림픽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점은 예기치 않은 부상

[서울와이어 글렌다박 기자] 꿈나무 선수들은 왼쪽 가슴에 태극기를 다는 ‘국가대표’ 발탁의 순간을 꿈꾼다. 또한 어느 스포츠 선수에게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 최고의 행운이자 영광이다. 올림픽 시즌이 돌아오면 가장 좋은 성적을 내기에 ‘효자종목’이라 부르는 종목이 여럿 있다. 동계 올림픽 종목에서는 단연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이다.

종목의 강국인 만큼 선수들 사이에서는 국제대회보다 국내대회 선발전이 훨씬 더 어려운 관문으로 여겨진다. 올림픽에서 우리나라는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에서 최다 메달 획득(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168개의 메달 중 48개의 메달을 획득했으며, 2018 평창 올림픽까지 한국의 동계올림픽 통산 31개 중 3/4에 해당하는 24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세계 신기록, 올림픽 신기록 등 다수의 기록을 보유했다.

고기현 선수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만 15세의 나이에 ‘개인종목 최연소 금메달 획득’이란 역사를 쓴 ‘레전드’다. 현재는 대한빙상연맹 이사로서 스포츠 행정가 겸 쇼트트랙 심판으로 바쁘게 활동하는 고기현 선수를 만났다.

2018년 평창올림픽대회 기간 중 담당베뉴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사진 제공=고기현)
2018년 평창올림픽대회 기간 중 담당베뉴 강릉아이스아레나에서. 사진=고기현 선수 제공)

◆옷이 다 젖어도 재미있었던 스케이트 타기

고 선수가 스케이트를 처음 탄 것은 다섯 살 때였다. 가족과 함께 롯데월드에 놀러 간 아이스링크의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연거푸 넘어지면서 옷은 금세 다 젖었지만, 그녀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스케이팅의 매력에 푹 빠진 고 선수는 마침 두 살 터울의 오빠가 다니던 홍대부속초등학교가 주최한 교내빙상대회를 통해 집 근처 목동아이스링크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이렇게 그는 오빠와 함께 정식으로 스케이팅을 배웠다.

“처음 스케이팅 클래스를 받으러 가기 전 멜빵바지처럼 생긴 유니폼과 기본 장비들을 하나씩 구매했습니다. 정말 설레고 들뜬 마음에 종일 그 옷을 입고 돌아다녔죠.”

그는 첫 훈련부터 범상치 않은 소질을 보였다. 오빠가 대회에 출전해야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취미보다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지만, 또래보다 키도 많이 크고 워낙 체격조건이 좋았기에 무리 없이 모든 훈련을 소화해내었다. 미취학 선수로 규모가 작은 대회에 출전해 수상하며 주변으로부터 "앞으로 잘 타겠다"는 심심찮은 칭찬도 받았다. 고 선수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부터 학년이 높은 선수들이 훈련하던 팀에 합류해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체육특기생이 된 이후 고 선수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전국체육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전국체전은 각 시도별로 미리 선발전을 치른 후, 시에서 선발된 인원이 본 대회에 출전하는 방식이다. 경력이 있는 5, 6학년 학생들보다 기량 차이가 컸기 때문에 그녀는 참가에 의의를 뒀던 대회였다. 하지만 막상 출전하니 앞서가던 선수들이 넘어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그는 전국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보다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선수 생활을 지속해야 할지 마음이 흔들린 적이 많았어요. 하지만 큰 규모의 전국대회를 경험하고 수상도 하니 무언가 한 단계 올라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기량이 한껏 성장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큰이모, 아버지와 함께한 고기현 선수. 1991년, 당시 다섯 살이던 그녀는 이날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탔다. 사진=고기현 선수 제공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큰이모, 아버지와 함께한 고기현 선수. 1991년, 당시 다섯 살이던 그녀는 이날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탔다. 사진=고기현 선수 제공

스포츠에 관한 배경이 전혀 없었던 가족은 고 선수가 재능을 발견하자 그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시작했다. 증권회사에 다니며 임원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그의 아버지는 주중, 주말의 경계 없이 바빴다. 그런 그를 대신해 그녀의 어머니가 스케이트를 시작한 날부터 매일같이 함께 훈련하러 다녔다.

집-훈련장-학교 사이 이동시간이 길고 애매할 때가 많았기에 하루 대부분을 차에서 보냈던 고 선수가 좀 더 편히 이동할 수 있게 차편도 늘 신경 써주었다. 나이가 점점 들수록 훈련량과 대회 일정도 많아지며 가족이 함께 모여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가족이 휴가를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고 선수에게 가족은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대표팀에 발탁돼 태릉선수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직접 운전하시면서 저를 챙겨주시고, 동시에 아버지와 오빠까지 신경 쓰시느라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살 터울의 오빠도 어릴 때부터 저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여러 가지로 힘들었을 텐데 저 하나로 인해 가족이 힘들게 시간을 보낸 같아 늘 감사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입문 6년 만에 국가대표에 발탁된 ‘신동 스케이터’

쇼트트랙 시즌은 대략 10월에서 다음해 4월까지 이어지며 시즌의 마지막 대회는 국가대표 선발대회가 열린다. 한 해 동안 국가대표로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했던 선수들을 포함, 그해 시즌 동안의 성적을 토대로 자격이 주어진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이 대회를 통해 선발된 국가대표 선수들은 다음 시즌 동안 국가대표로서 국제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쇼트트랙 종목의 경우, 국내 선수들의 기량이 출중하여서 국제대회보다 국내 국가대표 선발대회가 훨씬 치열하다고 할 정도다.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한 고 선수는 쇼트트랙 명문인 목일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진학과 동시에 ISU(국제빙상연맹) 세계 주니어 쇼트트랙 선수권 대비 선발대회에서 종합 1위를 하며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됐다. 그는 2001~2002년 시즌 쇼트트랙 월드컵대회 1차(중국), 2차(일본)에서 종합 1위, 3차(캐나다)에서 3위를 하는 등 국제대회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2001년~2002년 시즌 말, 우리나라 선수들의 종합 순위에 따라 올림픽에서의 종목당 출전 가능 선수의 수가 결정되는 쇼트트랙 월드컵 겸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자격 선발대회에서 당시 팀의 막내였지만 종합 2위에 올라서는 파란을 일으키며 올림픽 출전 자격을 획득했다. 대회 시기에 맞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최대한 올림픽 출전과 유사한 마음가짐으로 대회에 임했던 결과였다.

“저는 누가 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거나 기교가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특별함을 꼽자면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힘과 다부진 체격이 강점이었습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경기 중. 사진=Donald Miralle 제공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경기 중. 사진=Donald Miralle 제공

당시 중학생이었던 고기현 선수는 국제대회에서 성인선수들과 맞붙기 위해 오직 훈련에 매달렸다. 이미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꾸준히 새벽 훈련을 해왔던 그녀였다. 이후에도 오후 지상훈련, 저녁훈련, 마무리 훈련을 지속했고 겨울 시즌을 위해 체력단련을 시작했으며 경기가 없는 여름 시즌에는 훨씬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대회가 열리는 겨울 시즌엔 여름 동안 다져온 체력을 유지하고 기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는 훈련을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선수 생활을 하던 때는 선수들의 장·단점 혹은 몸 상태에 따라 훈련 양과 방식이 조절되거나 전문적인 데이터와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지 않았다. 그저 본인의 체력적 한계를 넘는 것이 매일의 목표였고, 부상에도 가능한 훈련을 꾸준히 병행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건강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았다가 한참이 지난 후 아주 서서히 회복된 것을 보면 제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에 무리가 갔던 건 분명하지만 이것은 모든 운동선수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여자 1500m 금메달 시상식. 고기현 선수는 대한민국 최연소 개인종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사진=Donald Miralle 제공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여자 1500m 금메달 시상식. 고기현 선수는 대한민국 최연소 개인종목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사진=Donald Miralle 제공

◆부상을 이겨내고 획득한 올림픽 금메달

“올림픽을 준비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부상입니다. 훈련 도중 잘못 넘어져서 팔꿈치 부상을 당했는데 다행히 완전한 골절이 아니었지만 한동안은 오른쪽 팔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코너구간에서 직접 빙판을 짚어야 하는 왼팔이 아님이 다행스러웠고 그 상황에서 가능한 훈련만 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가장 아찔한 순간입니다.”

부상은 선수들에게 가장 무서운 요소 중 하나다. 아무리 큰 뜻이 있고 목표가 있더라도 부상은 선수들의 앞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앞두고 현지 상황에 맞게 체계적인 훈련이 진행됐다. 경기가 열리는 솔트레이크시티에 가기 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고지대 적응훈련을 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고 선수는 훈련 시나 평상시에도 코피를 자주 흘렸기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훈련이었지만 그녀는 어릴 때부터 꿈꾸고 운동선수 모두에게 제일 큰 무대인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회를 획득했다는 것에 마음이 뛰었다. 그녀가 올림픽에 출전할즈음엔 컨디션과 기량이 최고조로 올라와 있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이 개막해 고 선수가 경기장인 유타센터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전에 경험했던 그 어떤 경기장의 규모보다 훨씬 크고 관중도 많아 놀랐지만, 함께 경쟁하는 선수들은 한 시즌 내내 국제경기에서 만났던 선수들이었기에 경기 진행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출전하는 선수 중 최연소 선수로 처음 출전하는 올림픽이었기에 그 무게를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다른 국제무대와 같다고 여겼던 것이 그의 긴장을 한껏 덜어준 기회가 됐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운도 많이 따랐던 올림픽이었다.

“1500m 경기가 끝난 후 금메달이 확정된 뒤, 기쁘고 감동적이다는 느낌보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시상을 위해 단상에 올라섰을 때 비로소 실감이 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막연히 꿈꿨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훈련 때문에 한동안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 생각이 제일 많이 났습니다. 어려서 그랬는지 마음껏 활짝 웃지 못하고 그저 쑥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1500m는 대회 초반 개인종목으로 출전하는 첫 경기이자 역대 동계올림픽 중에서 당시 처음 채택된 종목이었고 고 선수가 가장 자신 있었던 종목이었기에 긴장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대회 후반부에 열린 1000m 경기는 1500m 경기보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후회 없는 경기를 하자’는 생각을 하며 출전했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 출전 이후 최고의 전성기에 올라와 있던 중국의 양양A, 양양S 선수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경쟁한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여자 1000m 경기 후 태극기 세레모니와 은메달 시상식. 사진=Donald Miralle 제공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여자 1000m 경기 후 태극기 세레모니와 은메달 시상식. 사진=Donald Miralle 제공

그녀는 중국의 양양A 선수와 양양S 선수의 팀플레이에 밀려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올림픽 마지막 개인전 경기에서 모든 것을 쏟았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후회 없는 경기를 펼친 것에 마음이 후련했고 경기가 끝난 후 빙판 위에서 두 양양 선수와 악수하면서 비로소 활짝 웃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올림픽메달리스트가 된 후에 가장 크게 느꼈던 변화는 경기장 밖에서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해 여름 2002 한일 월드컵을 응원하기 위해 친구들과 거리응원을 나간 적이 있는데 많은 분께서 알아보셔서 신기하기도 했고,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의 꿈을 위해 오랜 시간 고생했던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했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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