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서대문형무소' 내 유관순열사 초상화]

 

[서울와이어 소인정 주부기자] 3ㆍ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올해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한 분야별, 지역별 다채로운 행사가 계획 중이라는 보도를 들었다.

문득 학창시절, 국사 시험 때마다 단일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별의별 이유의 전쟁, 민족운동, 저항운동과 시대별 영웅 등 암기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를 엄청 원망(?)했었던 철 없던 시절이 생각나면서 왠지 모를 죄송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적어도 3ㆍ1 운동에 대해 나름 알아보고 100년을 맞아야 할 것 같은 면죄부성 책임감을 스스로 부여했다.

그래서 “3ㆍ1운동=유관순 열사” 밖에 몰랐던 백지 같은 내 머릿속에 틈틈이 최선을 다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정리해보았다.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일어난 3ㆍ1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남녀노소는 물론 계층 구별 없이 전 민족이 봉기한 항일독립운동이다. 비폭력 저항이었던 3ㆍ1운동 정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민족의 독립운동과 외교 활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는데 우선 3ㆍ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의 간략한 스토리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전 후에 남겨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제창으로 당시 식민지 지배를 받던 세계 여러 나라들이 큰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던 중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 유학생들이 『2ㆍ8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국내 독립운동 지지자들에게 큰 용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에 국내ㆍ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독립선언을 준비하게 되었고 3월1일을 거사일로 잡고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인쇄에 이른 새벽부터 학생들이 서울 시내에 배포하고 정오 무렵부터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하고 오후 2시 각 종교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민족대표들은 선언서 낭독 후 만세 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하여 자진 체포 당했으며 이후 탑골 공원에 운집한 5천여명의 학생들은 2시30분경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이 시위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동참했으며, 서울 외에 6개 도시에서 벌어졌고 다음날엔 인근 지역 도시들로 확산되고 3월 중순 이후에는 농촌으로도 확대되어 5월 중순까지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 계속되었다. 또 3ㆍ1 운동 소식은 국외에도 전해져 3월 10일 이후에는 만주, 미국, 중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사이 3ㆍ1 운동 직 후 상하이로 집결한 국내ㆍ외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4월 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처럼 3ㆍ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은 우리 민족사의 큰 전환점으로, 현재 우리나라를 있게 한 커다란 밑거름이라 할 수 있고, 생각 할수록 가슴 먹먹한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이 운동은 일제의 무력 통치를 문화통치로 바뀌게 하고, 독립운동의 주체가 지배자가 아닌 민중이라는 자각을 하게 한 운동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독립운동이면서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정의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나라 독립만 생각했다면 부흥운동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민(民)이 주인인 나라를 건설하고자 대한민국정부수립 운동까지 한 것이기 때문에 왠지 모를 가슴 뿌듯함도 있었다. 이런 뒤늦은 자기주도적 학습을 하고 일각의 현장체험을 하기 위해 “서대문 형무소”를 찾았다. 

 

[사진='서대문형무소' 내 외벽 출력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3ㆍ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문화재에깃든 100년 전 그날』 전을 2월19일부터 4월 21일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주말에 많이 따뜻해진 날씨와 100주년 행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기나긴 입장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표를 사기 위해 차가운 적벽돌 담이 만들어낸 응달에 한참을 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내 눈으로 확인 할 100년전 상황에 대해 충분히 슬퍼하고 울컥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막상 입장권을 들고 맨 처음 전시관을 들어서자마자 주체측에 대한 분노가 제일 먼저 일었다.

 

[사진='서대문형무소' 입장 대기줄 모습]

담장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우려했던 부분을 초입부터 확인하게 된 것이다. 설정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엄숙해야만 하는 그 공간을 마치 동물원에 단체 입장하듯 입구부터 표시된 관람 방향을 따라 피와 눈물로 얼룩지고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수많은 의사(義士),열사(烈士),지사(志士)들의 한(恨)이 느껴지는 역사의 현장에서 잠깐의 명복이나 한탄을 할 겨를도 없이 그저 줄 따라 휙휙 지나쳐 정해진 출구로 나와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약속된 100주년 행사를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이런 역사의 현장 방문객이 많아 질것이라는 예상을 작년 99년째에는 전혀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나름 거대한 감옥인 이곳을 최선을 다해 발 도장 찍으며 돌아다녀보았는데, 이곳은 독립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4개 정도의 옥사를 돌아볼 수 있고 형무소 내의 노역장인 공작사, 지난 2017년 8월 15일 아침에 바람에 꺾인 미루나무가 98년을 함께했던 사형장, 사형시킨 시신을 몰래 반출하던 통로인 시구문, 수감자 운동장인 격벽장, 상상조차 하기 힘든 기발한 방법의 고문으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지하 고문실 등 상상조차 어려운 악행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었다.   

그런 역사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현재까지도 보수하면서 지켜오는 이유를 생각하며, 지금은 어르신들만의 만남의 장소인 탑골공원을 지나 걸어오는 내내 이런저런 생각이 들며 참 씁쓸했다.  

한ㆍ일 전이라면 종류 상관없이 무엇이든 일단 이겨야 하고, 주제는 몰라도 일본이 더 낫단 보도를 들으면 무턱대고 배부터 아파하면서 정작 일본으로 하여금 지난 역사 속 우리민족에게 행했던 많은 악행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게 하고, 진실을 밝히고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현재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서대문형무소' 내 역사전시관 입구]

역사 속 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해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몸소 투쟁했다면 시대 변화를 거쳐오는 흐름 속에서 우린 그들이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바쳐 찾아 만들어 놓은 “나라”의 입장으로 잊지 않고 어떤 평화적 항쟁을 이어오고 있었나 묻고 싶다. 일본에서는 여러 차원에서 충분히 사과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수긍이 안 되는 부분이 아직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진실에 근거해서 사과를 해주었으면 하는데 그들이 그것을 몰라 못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더더욱 미지근한 우리의 입장이 답답할 따름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를 시작으로 강제 징용문제도 현재까지 만족스런 답 없이 진행 중이고 이런 문제는 그분들이 돌아가신다고 끝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고 그때부터가 다시 시작일지도 모른다.

답을 얻으려 아우성 쳐도 결국 혼자 돌아가는 주문일 뿐이고, 반복하는 실패와 그럼에도 항복을 모르는 고통을 대하는 방식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라면 역사 속 그들처럼 모질게 끝까지 하나를 위해 버텨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선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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