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째 이어온 ‘알파걸’
아동 성폭력 트라우마를 페미니즘 서적으로 치유
한국여성의전화 영감 계기로 본격적인 여성운동 시작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 변화 절실

[서울와이어 글렌다박 기자] 학부 재학시절인 2012년부터 한국 여성의전화 자원 활동을 비롯한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원 교육, 가정폭력피해자 법률지원, 여성폭력쉼터 긴급상담 자원 등 10년 가까이 가정 폭력, 성폭력 등 여성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며 수백 명의 피해자를 만나온 김나영 변호사. 국제 변호사로서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다 지난 3월 귀국한 그녀와 만나 가정폭력 및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고충, 여성 인권 실현, 페미니스트로서의 활약, 미투운동 등에 관하여 인터뷰를 나누어 보았다.

여성운동가 김나영 변호사 사진=홍세미 제공
여성운동가 김나영 변호사 사진=홍세미 제공

◆ 삼대째 ‘알파걸’인 모계

김나영 변호사는 10대 시절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남녀공학을 다녔지만, 문과 성별 분반을 시행하는 학교를 다니면서 실질적으로 ‘여고’와 같은 생활을 했다. 교육열이 강한 환경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고 성취욕이 많았던 그녀는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고교 시절 동안 입시에 온 힘을 기울이며 매년 학급 임원을 도맡았고 각종 교내 경시대회도 수상했다. 이 시절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여자도 당연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자랐지만 ‘여성이 성차별과 여성억압의 피해를 겪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3년 동안 여자 친구들과 한 반에서 어울렸기 때문에 여성만 있는 환경이 낯설지 않고 편안해 훗날 여성운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모든 분야에서 남학생과 동등하거나 남학생보다 뛰어난 여학생을 '알파걸'이라고 부르지요? 제 유년기가 그랬고 변호사인 어머니와 교사였던 할머니의 유년기 역시 그랬습니다. 저는 삼대째 알파걸인 모계입니다.”

반포고등학교 재학시절 ‘공부 잘하는 문과생’이었던 그녀는 고교 시절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변호사와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미국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애티커스 핀치 등을 동경하며 연세대 법학과에 진학해 법학과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이윽고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 과거 트라우마의 돌파구가 된 페미니즘 서적

08학번으로 김나영 변호사가 법과대학에 입학했을 당시 한국에는 미국식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학과 내 분위기는 굉장히 어수선했다. 법학과 학부 신입생을 받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사법시험 폐지 전, ‘하루빨리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조급한 분위기였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것들이 변하는 과도기에 사법시험이든 로스쿨이든 학생이자 고시생으로서 빠른시간 안에 진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사회적 약자나 정의에 대해 깊게 고민을 해보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2008년 12월, 만 8세 여아를 성폭행한 후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하여 영구장애를 입힌 일명 ‘조두순 사건’이 일어났다.

김나영 변호사는 열 살이 되던 해 방과 후 다니던 학원 원장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아동 성폭력 피해자다. 그녀의 이후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아동기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성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경험으로부터 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기억을 의식 한편에 묻어 두고 잊은 듯 살아가는 경우로, 그녀 역시 예전 기억이 글이나 사진, 영상으로 기록해두거나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이 따로 상기시켜주지 않는 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조두순 사건은 오랜 시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어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열게 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심각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으로 고생하며 일 년 반 동안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구한 날 혼자 도서관 구석구석을 배회하다가 페미니즘 서적을 발견한 것이 치유의 실마리가 됐습니다.”

그녀가 공부하던 문화인류학과에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있었기에 다시 복학하였을 때 문화인류학을 이중전공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여성폭력 피해자를 돕고 여성인권운동을 벌이는 활동가들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 한국여성의전화에 가입하여 자원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은 그녀가 전에 만나보지 못했던, 진정으로 본받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인물들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활동을 하며 받은 힘과 영감 덕에 그녀는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어린 친구에게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그 일은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는 존엄하고 소중한 존재다’라는 말입니다. 또 아이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부모님들이 자신을 탓하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며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분들에게도 ‘당신의 돌봄과 사랑으로 아이는 괜찮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한 성폭력 문화와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함께 바꿔나가 주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12년 가을, 한국여성의전화가 주최 제6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김나영 변호사는 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기자단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에 눈을 떴다. (사진제공=김나영)
2012년 가을, 한국여성의전화가 주최 제6회 여성인권영화제에서. 김나영 변호사는 한국여성의전화 대학생기자단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에 눈을 떴다. (사진제공=김나영)

◆ ‘여성폭력은 심각한 범죄이자 인권침해’, 제도 도입 시급

가정폭력 및 성폭력에 있어 사회적으로 변화·개선되어야 하는 것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이 수치심을 느껴야 할 일’이라는 ‘인식’이다. 폭력 피해 자체만으로 충분히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피해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할만한 행동을 했겠지’라는 폭력유발론이나 ‘피해를 당했으니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는 편견은 피해자를 더욱 괴롭게 하고 침묵하게 만든다. 미투운동에 힘입어 예전보다 나아진 상황이지만 피해자에게도, 피해자를 돕는 여성운동가에게도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정폭력과 성폭력, 성착취 등 여성폭력 근절을 위해 국내에서 가장 시급하게 도입되어야 할 제도는 여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분명한 처벌,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여성폭력 피해자의 인권 보장, 여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성매매 여성 비범죄화 및 인신매매법 제정, 그리고 사이버상 여성폭력 처벌 강화입니다. 이 제도들을 통해 여성폭력이 심각한 범죄이자 인권침해라는 인식을 널리 알리고 피해자의 인권 보호를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나영 변호사의 피해자 옹호 활동 첫째 원칙은 ‘비밀유지원칙’이기에 사연을 자세하게 공유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만난 피해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폭력 피해를 당하고 그녀가 일하던 기관에서 도움을 받은 외국인이었다. 피해자는 본국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기관에 찾아와 ‘자신도 앞으로 본국에 돌아가 다른 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여성운동을 하겠다’라는 다짐과 약속이 담긴 편지를 건넸다. 감동과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계속>

인터뷰/글 글렌다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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