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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와이어] 우리는 가끔 대화 도중 “막간을 이용하여...”라는 새로운 상황을 부를 때가 있다. 이러한 막간을 이용한 상황이 훗날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논쟁의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17세기 초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극을 음악으로 재연하였다는 내용을 토대로 음악과 극의 결합하고자 했다. 그것은 지금의 오페라로 음악, 극, 무대의 성악음악이다. 초기 피렌체에서 시작한 오페라는 주로 궁정의 결혼식이나 축연 행사에 공연되었다. 내용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 내용이나 영웅의 주제였고 다소 심각한 내용의 귀족 오락물이었다. 점차 진지한 내용의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라고 하였고, 공연의 막과 막사이에는 흥미있는 극을 첨가했다. 지금의 공연도 1부와 2부 사이에 인터미션을 두어 잠시 차를 마시거나 휴식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그 당시에는 막간을 이용하여 짧은 막간극(intermezzo)을 첨가한 것이다. 즉, 오페라가 3막이면 1막과 2막 사이에 오페라의 내용과 상관없는 극을 넣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세 명 정도가 등장하여 풍자적인 사회내용이나 귀족들을 골리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의 코미디를 상영했다.

 

페르골레시(Giovanni Battista Pergolesi, 1710-1736)는 1733년 카를로 6세의 왕비 엘리자베타 크리스티나(Elisabeth Christine)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오페라 세리아 <오만한 죄수(Il prigionier superbo)>를 공연하였다. 그 사이 막간극으로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e)를 첨가했는데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오페라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오페라<오만한 죄수>를 기억하지 못해도 오페라에서 막간극인 <마님이 된 하녀>의 노래만 기억할 정도였다. <마님이 된 하녀>는 이탈리아 전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비엔나, 파리 등 모든 유럽에서 공연되었고 막간극이 아닌 단독으로 상연에 이르렀다.

 

1753년 <마님이 된 하녀>는 프랑스에서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의 오페라 <아치스와 갈라테아(Acis and Galatea)>가 공연되던 날 초연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두 오페라를 비교하면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귀족적이고 권위적이며 진지한 오페라를 추구하는 프랑스에서는 유쾌한 <마님이 된 하녀>가 탐탁지 않았다. <마님이 된 하녀>의 내용은 여자 주인공 하녀가 부유한 노총각 귀족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로 귀족입장에서 보면 절대 유쾌하지 않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과 배척하자는 사람 사이의 논쟁은 훗날 오페라 부퐁논쟁(Querelle des Buffons)의 발단이 된다.

 

페르골레시는 이러한 오페라에서 중요한 음악가이지만 사실 교회음악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페르골레시의 내용은 다음번에 이어집니다.)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 중 Stizzoso mio stizzoso)

 

<글: 김유나 컬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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