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초상인 화페-독일 화폐가 유로화로 통합되기 이전 지폐 100 마르크화 (사진: 구글)]

 

[서울와이어]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 슈만 (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1896)은 독일의 피아니스트이며 비크(Johann Gottlob Friedrich Wieck,1785-1873)와 마리안네(Marianne Tromlitz, 1797-1872)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비크의 아버지는 상인이었고 비크는 신학을 공부했지만 독특한 피아노 지도법으로 피아노계에서는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였다. 클라라의 어머니 마리안네의 가정은 음악적인 가문의 집이었다. 마리안네의 할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관현악단인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플룻 거장인 요한 레오르그 트롬리츠 (Johann Georg Tromlitz, 1725-1805)이며 그녀의 아버지도 합창 지휘자 였다. 

 

비크는 결혼과 상관 없이 이혼 후 5살의 클라라에게 체계적인 피아노 공부를 가르쳤다. 클라라는 언어, 알파벳이나 숫자를 익히기 전 악보 보는 법을 먼저 읽었으며, 음악에 대한 리듬 감각도 남달랐다. 어린 클라라를 위해 비크는 피아노 건반 높이에 맞게 특별히 고안된 장치를 피아노에 달아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실기 뿐 아니라 화성학, 음악이론, 작곡, 현악기를 가르쳤으며 훗날 오케스트라 총보 보는 법도 가르쳤다. 그리고 강인한 근육을 위해 산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클라라의 명성은 대단했으며 당대 장래가 촉망되는 연주가였다. 괴테, 파가니니, 멘델스존, 리스트들도 극찬한 그러한 피아니스트였다. 

 

비크 역시 클라라가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대성 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라라는 정성 어린 교육을 뒤로 한 채,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했다. 클라라에 비하면 슈만은 피아니스트로는 가망이 없는 음악 보잘것없는 음악가였다. 그런 클라라에게 슈만과의 결혼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게다가 클라라의 거듭되는 임신과 출산, 육아 그리고 가사 때문에 작곡은 물론 연주 활동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슈만을 믿고 내조하여 지금의 슈만이 있게 되었다. 

 

(1846년 바흐 음악을 연구하고 작곡한 클라라 슈만의 곡)

 

슈만의 정신 질환은 투신에 이르게 되었고, 투신 소동 이후 생계의 몫은 클라라에게 달리게 되었다. 여섯 아이의 엄마이자 임신부인 클라라는 슈만의 음악을 알리고 연주하면서 슈만과 함께했다. 그리고 그런 클라라 뒤에서 격려해주고 지켜봐 주는 음악 친구인 브람스가 있었다.

1856년 슈만의 죽음으로 클라라에게는 두 번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시작이었다. 

일곱 자녀의 교육과 생활을 책임진 어머니로 자식들은 기숙사에 맡기고 연주비와 레슨비 그리고 작곡 생활에 생계를 벌어들였다. 클라라는 생활력이 강했다. 아니 강해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결국, 슈만이 죽은 후 40년 동안 클라라는 재혼 하지 않고 슈만의 음악과 브람스의 곡을 연주하고 알렸다. 그리고 슈만의 묘지 옆에 1896년 묻히게 된다.

 

클라라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었다.

 

 ‘슈만의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숨결을 느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온몸이 그의 음악 속에 녹아내리는 듯하다’

 

<글 : 김유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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