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차이코프스키 사진=위키피아]

 

[서울와이어] 자신이 자신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자신의 역량이 부족할 때 혹은 상대가 먼저 돌아서는 경우, 상대에 대한 원망보다 정리되지 않는 자신에 대해 더 아프다. 상대가 이성이건 동성이건 스승이건 제자이건 연상이건 연하이건 간에 상처는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차이코프스키(Piotr Ilyitch Tchaikovsky, 1840-1893)도 그러했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소심했으며 마음이 여리고 나약한 사람었다. 

차이코프스키는 1876년 12월 폰 메크 부인을 알고 그녀에게 일 년에 6000루불이라는 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폰 메크 부인이 후원해 주는 조건 중 ‘하나는 만나지 말자’라는 엉뚱한 내용도 있었다. 그녀를 단지 후원자로만 생각했다면 차이코프스키 역시 그녀와 헤어졌을 때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는 그녀를 신뢰하였으며 정신적인 교감을 주고받았다. 음악 애호자인 폰 메크 부인에게 차이코프스키는 작곡 과정에 따른 음악 이야기도 상세히 편지로 보냈다. 그런 지 14년이라는 시간과 오간 편지도 1200통이 넘었다.

비록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녀와의 플라토닉 사랑과 음악적 교감은 차이코프스키에게 무조건적일 것이다. 그러나 1890년 하루아침 폰 메크 부인에게서 갑자기 절교 선언이 떨어진다. 

 

“재정적인 파탄으로 더 이상 경제적인 후원이 불가능하며 이제 관계를 끝내자” 

 

이후 갑작기 폰 메크 부인과의 연락은 두절되어 버렸다. 이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정부로 매년 1000루불의 연금을 받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금전적인 지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경제적인 지원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을 강조하며 편지를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차이코프스키가 더욱 배신감을 들게 한 것은 폰 메크 부인의 재정 상태가 이전과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폰 메크 부인에게도 말 못 할 사정도 있었겠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그동안 믿었던 그녀의 절교 통보는 절망적이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사망 전까지 그녀를 원망했다고 한다. 

 

여전히 지금도 폰 메크 부인이 왜 갑작스레 차이코프스키를 버렸어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의 추측만 있을 뿐이다.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폰 메크 부인의 가족이 불치병에 걸려서 그를 돌보기 위한 설 등의 가설만 있을 뿐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리고 1893년 차이코프스키는 자살 강요로 추측되는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고 마치 그를 따라가듯 2달 뒤 폰 메크 부인도 사망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1876년 작곡하고 1877년 완성된 《로코코 변주곡》은 빌헬름 피첸하겐(Wilhelm Fitzenhagen, 1848-1890)을 위해 작곡했다.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한 곡은 아니지만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 부인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고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글 : 김유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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