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철 경제 칼럼니스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저자.
신세철 경제 칼럼니스트,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저자.

소비자물가에서 농산물, 석유류 같은 일시적 공급충격요인을 제외한 근원인플레이션(underlying inflation) 추세를 볼 때 한국경제는 상당 기간 물가 불안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순조로운 경제순환을 위해서라면 물가안정목표치를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근원인플레이션이 최소한 경제성장률보다 낮아야 한다.

이를테면 2023년 한국 경제성장률이 1.5%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물가안정목표 2%도 너무 높은데, 근원물가상승률이 4% 내외로 맴도니 실질임금 삭감 효과가 커서 근로의욕을 상실하기 쉽다. 경기 침체를 무릅쓰고 물가 불안을 해소하려다가 불황의 늪에 빠지고 반대로 물가불안을 무릅쓰고 경기를 부양하려다가 ‘만성인플레이션’에 시달릴 우려가 있다.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22년 7월 9%에 육박했다가 2023년 3월 중에는 전년 동월 대비 5% 상승해 물가안정 기미가 보이는 듯했다. 문제는 근원인플레이션이 5.6%나 상승해 언제 물가불안이 해소될지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근원인플레이션은 장바구니 체감물가와 괴리될 수 있는 단점이 있지만 물가 변동 추세를 보다 정확하게 가늠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기후변화와 산유국 변덕에 따라 변동하는 소비자 물가지수를 집착하다 보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참고로 한국은행은 2006년까지 통화정책 판단자료로 근원물가상승률을 활용했으나 2007년 이후에는 소비자물가상승률로 바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금융시장에서나 정책당국이나 인플레이션을 촉발한 공급망 교란 문제가 한시적이라 생각하고 빠른 물가안정을 속단했다. 그 이후 세계적 물가 불안은 공급 교란 요인보다 무턱대고 풀어댄 과잉유동성이 더 큰 원인이어서 (근원)인플레이션이 쉽게 진정되기 어려운 상황임을 간과했다.

사실 이미 물가불안 요인이 잠재됐다가 코로나 사태가 도화선이 되면서 물가 불안이 표면화됐다. 생산성 향상으로 20세기 말 이후 상당 기간 물가가 안정됐던 타성 때문인지 몰라도 전 세계적 유동성 범람이 물가에 미칠 해악을 무시했던 셈이다.

물가 변동 추세를 멀리 관찰하면 근원물가 변동 폭보다 소비자물가 변동 폭이 좀 더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세계 경제는 대량생산 혁명이 계속 진행되면서 물가안정 기조가 상당 기간 자리 잡았다.

다른 조건이 일정하다면 물가는 통화량과 유통속도에 따라 변동되는데 생산성 향상 속도가 통화량 증가 속도를 넘어선 데다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가 활발해지며 통화유통속도 하락 추세가 계속됐다. 문제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유동성 팽창이 가속도를 내면서 각국 통화정책 목표가 경제성장인지 물가안정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늘 그래 왔듯이 재정적자, 유동성 확대로 말미암은 갖가지 부작용의 대가는 모두 가계와 기업이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물가 불안으로 많은 사람이 삼시세끼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에서 국민소득 3만5000달러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국경제는 저성장 기조에 접어든 국면에서 끈적거리는 물가 불안과 함께 꿈틀거리는 저소득층 금융 불안 문제를 생각할 때, 갈 길은 멀고 해는 서산마루에 걸쳐 있는 형국이다. 정말 우려되는 일은 경제에는 공짜가 있을 수 없는데, 언제나 그래 왔듯이 묘수를 찾으려다가 자칫 더 큰 시련에 봉착할 수 있다. 순리에 따라 차례차례 해결방안을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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