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곽인찬 경제칼럼니스트.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파장을 불렀다. 정부는 내년 R&D 예산을 올해(31조1000억원)보다 16.6% 적은 25조9000억원으로 편성했다. 과학기술계는 크게 반발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바로잡겠다”며 벼르고 있다.

R&D 투자 강국인 한국이 관련 예산을 줄였다는 소식은 국제 뉴스가 됐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는 왜 내년 R&D 예산을 두자릿수나 줄였는지, 정기국회 심의 과정에서 증액될 가능성은 있는지 등을 살펴보자.

◆‘R&D 카르텔’ 언급이 출발점

지난 6월 하순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재정중독은 미래세대 약탈로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나라를 위해 건전재정,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말로 재정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하필 불똥이 R&D 예산으로 튀었다. 윤 대통령은 “국가 R&D 사업의 합리화가 필요하다”며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부랴부랴 내년도 국가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다시 살폈다. 감사원은 R&D 예산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8월28일 윤 대통령은 국민의힘 의원 연찬회에서 “그야말로 나라가 거덜이 나기 일보 직전”이라고 말했다. 전임 문재인 정부의 ‘흥청망청’ 예산을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튿날인 8월29일 정부는 656조9000억원 규모의 새해 예산안을 발표했다. 올해 대비 지출 증가율이 2.8%(18조2000억원)에 그친 자린고비 예산이다. 올해 3%를 웃돌 것으로 예상되는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감축 예산이다.

윤 대통령은 “모든 재정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정치 보조금 예산, 이권 카르텔 예산을 과감히 삭감했고, 총 23조원의 지출구조조정을 단행했다”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R&D 예산으로 올해보다 5조원 넘게 깎였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건전 재정은 바람직하지만

윤 대통령은 8월29일 국무회의에서 전임 문재인 정부의 예산을 ‘선거 매표 예산’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는 전 정부가 푹 빠졌던 ‘재정 만능주의’를 단호히 배격하고 건전재정 기조로 확실하게 전환했다”고 말했다.

사실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자린고비 예산을 편성한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문재인 정부는 씀씀이가 컸다. 수시로 추가경정예산을 짰다. 그 바람에 임기 5년 동안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껑충 뛰었다. 이 비율은 올해 50.4%에서 내년 51%로 조금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윤 정부가 들어선 뒤 강하게 제동을 건 덕이다. 

주요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나랏빚이 양호한 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크게 밑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 지구촌에서 독보적인 저출산 추세를 고려하면 안심할 형편이 못 된다.

◆뿔난 과학기술계

9월18일 ‘국가 과학기술 바로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는 “카르텔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성명은 “R&D 예산 삭감과 관련해 연대회의 공동대표단과 끝장 토론을 열자”고 제안했다. 지난 5일 결성된 연대회의엔 과학기술계 노동조합과 과학기술인연합회 등 10개 단체가 참여했다.

기초연구 분야 27개 학회·협회가 소속된 기초연구연합회도 20일 성명을 내고 “기초연구 사업 연구비 예산 삭감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앞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한 4대 과학기술원과 서울대·고려대 등 주요 대학 이공계 학생들은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성명을 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이달 19일 ‘과학 지출 챔피언인 한국이 (예산) 감축을 제안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기사는 R&D 예산 삭감이 기초과학 연구의 경쟁력을 잃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국내 연구자들의 우려를 전했다.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는 24일 “과학적인 발견은 자주 나오지 않지만, 선거는 4~5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점이 문제”라면서 “(R&D 예산 삭감이) 한국 과학계에 어느 정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노보셀로프 교수는 이날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노벨프라이즈 다이얼로그 서울 2023’ 행사에 참석했다.

같은 행사에 참석한 조지 스무트 홍콩과학기술대 교수는 “한국은 사람에 대한 교육,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로 세계 경제 규모 10위권에 올라선 국가”라며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도 기초과학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R&D 지출은 절대규모 면에서 미국-중국-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5위 다. 그렇지만 GDP 대비 상대규모를 보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다. 그런 나라가 R&D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나섰으니 국제 사회가 깜짝 놀란 것도 당연하다.

사진=국회 제공
사진=국회 제공

◆예산안 심사 벼르는 민주당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예산안은 안(案)일 뿐이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한다. 현재 국회는 야당이 지배한다. 심의 때 민주당의 입김이 크게 작용할 여지가 크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달 18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민주당은 과거로 가는 정부의 R&D 예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R&D 예산을 각각 10.9%, 13.8% 늘렸다”면서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역대 모든 정부는 미래에 투자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의 R&D 예산 삭감을 “기술패권 시대와 동떨어진 21세기판 쇄국정책”에 비유했다. 

그러나 국회는 제 맘대로 예산을 증액할 수 없다. 헌법은 57조에서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정부가 한발 물러서지 않는 한 민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다만 여당인 국민의힘이 R&D 예산 증액에 동조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R&D 예산 늘리자

재정건전성을 높이려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는 나무랄 일이 아니다. 다만 왜 하필이면 R&D 예산을 희생양으로 삼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7월 정부와 여당은 실업급여 제도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공청회에선 실업급여가 달콤한 ‘시럽급여’가 됐다는 둥, 실업급여로 ‘샤넬 선글라스’를 산다는 둥 여러 말이 나왔다. 그러나 여론은 좋지 않게 돌아갔다. 정부·여당이 실업급여의 긍정적 효과는 도외시한 채 일부 부작용을 과대해석했기 때문이다.

실업급여의 본질은 딱한 처지에 놓인 실업자를 돕는 데 있다. 복지 누수는 막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실업급여 자체를 건드리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국가 R&D 예산도 마찬가지다. 예산을 끼리끼리 나눠 먹거나 또는 부서별로 중복 집행하는 폐단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부작용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과감한 R&D 투자 전통을 훼손한다면 본말이 뒤바뀌는 격이다. 카르텔이 문제라면 카르텔만 부수면 된다.

대한상의 등 경제단체와 민간연구기관들은 18일 ‘산업대전환을 위한 민간 제언’을 정부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한국 경제가 저성장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보다 “정부가 투자지주회사를 설립해 첨단산업분야 인내자본을 형성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성과가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자본은 오직 정부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민간은 단기 수익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서울 공대 교수들은 공저 ‘축적의 시간’에서 “우리 산업이 처한 경쟁력의 위기는 고부가가치 핵심기술,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의 부재에 있다”며 “이런 역량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경험과 지식을 축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확보된다”고 역설했다. 이 역시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 투자가 필수다. 

재정건전성도 도그마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선거용 일회성 지출은 단호히 배격하는 게 옳다. 그러나 기초과학의 토대를 쌓는 국가 R&D 예산은 아낄 돈이 아니다. 설사 국가채무 비율이 조금 높아지더라도 말이다. 

한국은 제조업 강국을 넘어 원천기술 강국으로 변신을 모색 중이다.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할 때가 됐다. 바로 이런 때 R&D 예산 삭감이라니…. 새해 R&D 예산이 최소한 올해 수준으로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