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철 경제 칼럼니스트('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신세철 경제 칼럼니스트('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앞서 수명 100세 시대로 다가서는 축복을 맞았다. 천하를 통일하고도 수명을 늘리려 갖은 힘을 다 기울인 진시황이 다시 태어난다면 갖은 영화를 물리치고 한반도 남쪽으로 망명을 시도할지 모르겠다.

이 자랑스러운 나라에서 어찌 된 영문인지 장수사회의 주인공이어야 할 노인들은 소외되고 있다. 국민소득 3만5000달러 깃발을 휘날리면서, 노인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데다 노인 자살률 또한 제일 높은 참담한 현실이 벌써 오래 이어지고 있다.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건강을 잃어버린 노인들의 장수가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고난일까.

유력인사들이 너나없이 청년들 표심에 추파를 던지느라 여념이 없다 보니 빛나야 할 황혼기가 빈곤에 찌들고 구겨지고 억눌리는 모양새다. 글줄이나 읽었다며 잘나 빠진 척하는 먹물들이 “60대가 되면 뇌가 썩는다”라든지 “노인은 투표할 필요가 없다” 같은 비인간적 말장난을 쏟아냈다. 급기야 “최대의 비극은 노인네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라며 “빨리빨리 돌아가셔야 한다”는 반인륜적 주술이 튀어나왔다.

출산율은 낮아지고 수명이 길어지는 초고령 사회에서 저성장, 재정적자 같은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얽힌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려 애쓰지 말고 단칼에 잘라버리자는 술책일까. 나치 독일이 골치 아픈 유대인 문제를 최소 비용으로, 최단 시간에 해결하려 ‘아우슈비치 수용소’를 세웠다는 겁나는 역사가 뇌리에 스쳐 갔다. 섬찟하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인간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인 수오지심(羞惡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던져버려야 출세하기 쉬운 ‘야만 시대’가 전개된 지 벌써 오래다. 어쩌면 “노인들이 빨리 죽어야 한다”는 끔찍한 저주는 개인의 망발이 아닌지도 모른다. 거짓과 위선을 무기로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켜 극한 대립을 부추겨야 능력자로 둔갑할 수 있는 ‘기만 시대’ 사회병리현상의 한 단면일지 모른다.

노인을 폄하하고 싶은 이상심리는 세상이 오염돼 자신도 더러워졌다면서 세상을 원망하는 자세를 그들 자신도 모르게 표출했는지 모른다. 다른 노인들이 일찍 죽거나 쓸모없이 되길 바라면서 저 혼자만 낙락장송 되어 독야청청하겠다는 오진 심보는 아닐 게다.

변치 않는 사실은 ‘노인의 과거는 청년이었고, 청년의 미래는 노인’이라는 점이다. 노인과 청년은 아무리 세상이 뒤바뀌더라도 서로 다른 짐승이나 다른 족속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들의 미래 모습을 현재 노인들의 모습과 견주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미래가, 오늘날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노인들처럼 어둡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식을 낳고 싶어 하겠는가. 노인 빈곤과 낮은 출산율은 낮지 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생각 없이 노인을 폄하하려는 인사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의 할아버지는 얼마 전 아기였고, 손주는 이다음 누군가의 할아버지가 될 것이다. 최소한 인간의 탈을 썼다면, 제 손주가 장수하기를 염원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을까.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늙어가기 시작하는데 ‘장수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려 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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