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다 낫다

[사진=네이버]

 

[서울와이어] 속담 중에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먼 곳에 사는 일가보다 낫다는 의미로 나는 가끔 아주 격한 공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음악가 베토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우리는 베토벤 불우한 환경을 이겨낸 대표적인 음악가로 기억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베토벤의 안들리는 귀의 고통을 이겨낸 음악가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가족관계에서도 힘든 사람이었다.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12–1773)이었다. 할아버지는 17세 본으로 이주해 온 궁정 악장이었고, 아버지인 요한 판 베토벤인 아버지(Johann van Beethoven, 1740-1792)는 궁정 테너 가수였다. 할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베토벤의 아버지는 소위 알콜 중독자이며 폭력적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동 모차르트의 연주가 크게 주목받았었다. 베토벤의 아버지도 베토벤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일 속셈을 갖고 가혹하게 피아노 연습을 시켰다. 신동의 타이틀을 이용하고자 1778년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8살의 베토벤을 6살이라 속이기도 했다. 알콜중독으로 생활력이 없던 베토벤의 아버지는 베토벤이 벌어들인 돈으로 술을 먹거나 흥청망청 썼다. 

일찍 어머니를 여인 베토벤은 동생들을 위해 가장의 역할도 해야했다. 원래 베토벤은 7남매였으나 4명은 죽고 베토벤과 두 남동생만 남았다. 그러나 그들도 모두 베토벤에겐 큰 짐이었다. 첫째 동생인 안톤 카알(Anton Karl Beethoven, 1774-1815)은 세무원이 되었지만, 형인 베토벤의 평판이 높아지자 베토벤의 초기 습작을 팔아 이익을 챙겼다. 

막냇동생인 니콜라스 요한(Nikolaus Johann van Beethoven, 1776-1848)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본에서 약사가 된 요한은 비엔나로 약사 조수로 일을 했다. 우연한 상황에 요한은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형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신 형의 작품을 마음대로 처분했다. 베토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것은 베토벤의 반대를 무릅쓰고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가정부와의 결혼한 후였다.

 

비록 베토벤의 가정환경은 불우했지만, 음악사상 베토벤처럼 훗날 많은 음악가에게 영향을 주는 음악가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역대 음악가들 중 가장 많은 후원을 받았을뿐더러 즉흥연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더욱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작곡가였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무려 2만여 명의 조문객이 애도를 표했다. 
베토벤은 당시 귀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이름의 붙여진 '판(van)이라는 호칭이었다. Van은 귀족에게 붙여지는 호칭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독일로 이주한 네덜란드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이웃사촌인 지인들의 소개로 이때부터 후원과 그의 삶에서 중요한 음악 활동의 연계가 된다.

본의 선제후이자 대주교인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장학금 지원이 있었으며 지급 기간이 끝날 후는 리히노프스키 공작이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베토벤은 선제후의 도움으로 빈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을 만나게 되었다. 하이든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하이든의 지도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아 오래 배우지 않음), 모차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이탈리아풍의 성악곡 작곡을, 그나츠 슈판지히에게는 바이올린 교습도 배웠다. 

1796년 베토벤 리히노브스키 공과 함께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여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

 

베토벤은 이 귓병 때문에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썼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죽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훗날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라고 한다. 베토벤은 유서를 쓰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자살할 의지는 없던 것 같다. 오히려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듯 이후의 작품은 대작이 쏟아졌다. 

 

베토벤 사망 후 그의 비서인 안톤 쉰들러가 베토벤의 서랍에서 세 통의 가슴 절인 편지를 발견한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불멸의 연인’에게 바치는 편지이다. 영화 ‘불멸의 연인’은 마치 추리극처럼 과거로 돌아가 그녀가 누구인가를 추적해 나간다. 물론 ‘불멸의 연인’의 결론은 너무나도 어의없는 허구이지만 베토벤의 그녀를 찾는 과정은 흥미롭게 전개된다. (내일 ‘불멸의 연인’으로 이어서 연재됩니다.)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 중에서]

 

<글: 김유나 컬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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