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구글,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백작 부인’]

 

[서울와이어] 1830년대의 파리 음악계는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와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등에 의해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으로 꽃을 피웠다. 피아노의 황제이자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알려진 리스트는 1833년부터 프랑스 살롱을 드나들었다. 

다구 백작가의 살롱은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 알프레드 드 비니, 소설가 빅토르 위고, 작곡가 베를리오즈, 시인 하이네와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 등이 드나드는 곳이었고 쇼팽도 합류한 곳이다. 그곳에서 리스트는 교양이 풍부하고 고급진 언행을 하는 하는 6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Comtess Marie d'Agoult, 1805-1876)을 보게 된다. 리스트는 처음부터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을 흠모하고 있었으나 마리의 행동은 냉담했다. 마리는 도도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였다. 사실 마리는 다구 백작과 사랑 없이 살고 있었으나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이 병으로 죽자 마리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게다가 조르주 상드의 자유로운 연애관에 영향을 받았다. (리스트는 쇼팽에게 조르주 상드를 소개해 주었다).

결국, 마리는 가정을 버리고 리스트를 따라갔다.

 

1835년 마리와 리스트 두 사람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거부한 채 사랑 만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 당시 파리의 사교계에서는 검색어 1위에 오를 만큼 핫 이슈였다. 타오르던 두 사람의 사랑은 세 자녀를 낳았지만 그리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마리는 백작부인으로 사치와 낭비가 심했고 리스트가 가정적인 남편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리스트는 귀족 출신이 아니라 음악을 해야 먹고사는 직업 음악가였다. 게다가 리스트가 전성기에 들어서려 했을 때였기 때문에 가만히 가정에 충실하게 있을 수 없었다. 리스트는 자신이 작곡한 곡과 연주로 가정을 뒤로 한 채 유럽 각지에 연주 여행을 했다. 리스트는 멀리 포르투갈, 터키 지역에서도 연주회를 했다.

 

1842년쯤 리스트의 열풍은 지금의 아이돌 가수들 이상으로 뜨거웠다. 리스트가 먹고 난 음료수 병을 귀족 부인은 향수병에 가져갔으며, 피다만 시가를 귀족 부인들이 서로 갖고자 싸움도 났다. 리스트도 대중의 마음을 잘 아는 음악가였다. 피아노의 뚜껑을 열어놓은 채 연주를 한다든지 피아노를 옆으로 놓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리스트의 가냘픈 브이라인 얼굴과 찰랑거리는 금발은 귀족 여성의 심금을 울리기 적합했다. 연주전에 코트를 뒤로하는 모습이라던지 초록색 장갑을 던지고 연주하는 쇼맨십도 보여주었다. 귀부인들은 환호성과 함께 귀금속을 던져주었고, 기절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리스트와 마리는 결국 막내 다니엘을 낳은 직후 별거 선언하고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 이후 두 사람의 애정관계는 더 이상 회복되지 못했으며, 자식 양육 문제 등으로 관계를 끌다가 1844년에 완전히 갈라선다. 

리스트와 마리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장녀 블랑댕(Blandine, 1835–1862)와 아들 다니엘(Daniel, 1839–1859)은 20대에 일찍 사망하고 차녀 코지마(Cosima, 1837–1930) 는 훗날 바그너의 부인이 되며 93살까지 장수한다. 

 

<글 : 김유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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