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첫 유조선 건조기 - (1)
조선소 건설 차관 승인 위해 16% 낮은 선가 불구 계약
26만t 건저 경험 없으나 첫 배가 중요하마며 총력 다해

현대중공업이 천 선박 건조 계약을 따내기 위해 영국 스코트리스고우로부터 구입한 26만t 짜리 유조선 도면. 사진=현대중공업 제공
현대중공업이 천 선박 건조 계약을 따내기 위해 영국 스코트리스고우로부터 구입한 26만t 짜리 유조선 도면. 사진=현대중공업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조선.

하지만 불과 50여 년 전만해도 한국은 초대형 선박 한 척 만들 능력과 인프라 또한 갖추지 못한 초보자에 불과했다. 범국가적으로 조선산업을 일류로 키우겠다는 일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현대중공업은 회사가 문을 닫지 않는 한 후발 주자들이 따라오려면 한참이나 걸리는 압도적인 선박 건조 실적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11월 16일 현재 누적 인도 선박 수 2272척, 1억5000만GT(총톤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조선사 중 가장 많은 수치다. 오늘의 현대중공업이 있기까지는 울산 조선소 건설과 함께 시작한 1, 2호 선박인 초대형 유조선(VLCC) 건조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현대중공업사’에 수록된 현대중공업의 최초 선박 건조 이야기를 통해 한국 조선의 위대한 승리를 되돌아본다.

◆16% 할인? 빨리 만들면 만회 가능

울산 조선소의 생산공장 및 도크 기초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1973년 3월 20일, 현대중공업은 기수주한 초대형 유조선(VLCC, Very Large Crude Carrier) 1호선 건조에 착수했다. 조선소 기공식 1년 후의 일이었다.

이 선박은 세계 해운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그리스 선단의 장로격인 리바노스로부터 수주한 것이다. 조선소 건설을 위해 차관을 구하러 유럽 각국을 오가던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 Export Credit Guarantee Department)로부터 차관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배를 수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면서 비롯됐다.

곧바로 정 회장은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시 미포만의 잡초 우거진 백사장 사진 한 장과 5만분의 1 지도 한 장, 기술 제휴 업체인 영국 스코트리스고우로부터 구입한 26만t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 들고 선박 영업에 나섰다. 국내에는 있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러 다닌다니, 사람들은 그에게 ‘봉이 정선달’이라며 비웃었다.

이때 역시 현대그룹에 조선 관련 기술 협력을 해주기로 한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이 소개한 선박 브로커 사익스를 통해 리바노스가 값싼 배를 구하고 있다며 만남을 주선했다.

1971년 10월 중순, 정 회장 일행은 스위스에서 선주 요르거스 리바노스를 만났다. 정 회장은 즉시 선가 척당 3600만 달러인 유조선 2척 건조를 제시했고, 리바노스는 이에 3095만 달러, 2년 6개월 후 인도, 계약 불이행 시 원리금 전액 변상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국제선가와 비교할 때 16%나 싼 가격이었다. 선대를 확대하고 싶지만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던 리바노스는 일부러 신생 조선국으로부터 싼값에 배를 사려고 했다.

수주가 절박했던 정 회장은 일단 일을 벌여놓고 조기에 완공하면 비용도 줄일 수 있어 16% 정도는 만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신참 조선소에게는 최초 상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구로부터 몇t급의 선박을 발주 받았느냐’에 따라 국제금융의 여신과 지급보증은 물론 다음 수주 상담, 나아가 조선소의 장래까지도 결정됐다. 양측이 공감대를 형성한 후 곧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바로 이 계약이 현대가 조선업을 시작하며 따낸 첫 계약이다.

◆“한국을 덴마크로 키워라”

이날 시업식에서 정 회장은 치사를 통해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산업대열에서 파견 나온 모든 기술인이 합심 협력, 총화적인 열성과 노력을 다함으로써 우리 울산 조선소가 질서 있고 능률적인 직장이 되도록 노력하자”라고 독려했다.

이어 쿨트 스코우 현대중공업 초대사장은 식사에서 “세계적이며 거대한 조선소 건설의 위대한 영단을 내린 한국 정부와 현대그룹 지도자 여러분은 당연히 찬양받아야 마땅하다”면서 “오늘은 선박 건조 시업식으로서뿐만 아니라 한국이 세계적인 조선공업 국가의 대열에 참여하는 역사적인 날인만큼 선박 건조가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도록 배전의 노력과 연구를 해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스코우 사장은 덴마크 오덴세 조선소의 기술 이사 출신으로 정 회장이 영입한 인재였다. 덴마크는 원래 농업국가지만 농민들을 훈련시켜 오덴세 조선소를 세계적인 조선소로 키워냈는데, 그는 이 조선소가 창립된 지 30여 년간 기술 부분을 담당해왔다. 특히 VLCC 건조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덴마크와 유사한 환경에서 출발한 울산 조선소의 초대사장으로 적임자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국내 선박 건조 경험은 대한조선공사에서 만든 1만7000t급 규모가 최대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본사가 건조하는 VLCC 1호선이 각 부문 모두 최고 수준의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맨 처음 만든 배가 국제시장에서 조악하다고 평가받을 경우 조선소의 앞날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본사에 이어 국가적 지원체제 하에 조선업에 뛰어든 대만의 경우는 첫 작품이 국제시장에서 조악하다는 평가를 받은 후 국제경쟁력을 상실했다.

첫 작품을 세계 최고 수준의 배로 만든다는 확고한 방침에 따라 본사는 선박 건조에 소요되는 기자재를 외국으로부터 최고급품으로 구입했다. 26만t급 선박 건조에 들어가는 기자재 물량은 엄청났다. 1호선의 크기는 길이 345m에 폭 52m, 갑판까지의 높이가 27m였다. 선체를 이루고 있는 강재의 중량은 3만4000t이었고, 선체 의장품의 중량은 4000t, 기관의장품의 중량은 1600t, 건조에 소요되리라고 예상되는 용접봉의 중량만 해도 900t에 달했다.

선내에는 선원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는가 하면, 기관실은 엘리베이터로 출입하게 돼 있었고, 각 침실과 사무실에는 공기청정기가 설치되도록 설계돼 있었다. 기관실에는 시속 15.8노트로 달릴 수 있도록 3만6000마력짜리 증기터빈이 장착되게 했다.

증기터빈은 스웨덴의 스탈라벨에서 구입했고, 보일러는 영국제, 대형 프로펠러와 펌프, 항해기기, 파이프류는 일본제였다. 강재는 주로 일본에서 구입했다. VLCC 1, 2호선 건조 시 국내에 포항제철(현 포스코)은 아직 준공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상당 기간 선박 건조에 필요한 중후판과 고인장강 등 특수강은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일본 철강제품의 품질은 세계 수준급인 데다가 값도 쌌다. 정부는 조선산업 중흥을 위해 선박 건조에 필요한 철강재 수입에 한해 관세를 면해줬다. 1972년 12월 28일 우리나라 소속 상선 안동호가 강재 1800t을 싣고 조선소에 처음 입항한 이래 일본으로부터의 강재 수입은 한동안 계속됐다.

기자재 구입이 완료되는 시점에 인력 수급 문제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마지막 팀이 1973년 1월 영국 스코트리스고우에서 연수를 받고 귀국, 각 공장에 배치됐다. 또 기능공훈련소에서는 1973년 3월 24일 1기 훈련생 324명을 배출, 수료식을 가진 뒤 이들을 작업장에 배치했다. 여건이 갖춰지자 1호선은 1973년 3월, 2호선은 8월에 작업에 착수했다.

<자료: 현대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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