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첫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PONY)’ 에콰도르 상륙기 (중)
벤츠·미국 차량 보유 에콰도르 소비자에 ‘제 2차량’ 어필
명문가 곤잘레스 형제 딜러 발굴, 택시조합 개척 성공
정세영 사장도 5차례 방문, 1976년 5대 처녀 수출 계약
포니 발음, 현지 국민들에게 친근감 받아들여지며 인기 상승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 당시)이 1976년 에콰도르 바이어와 국산 첫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의 처녀 수출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정세영 추모집 ‘포니정 나의 삶 나의 꿈’ 캡처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왼쪽에서 두 번째, 당시)이 1976년 에콰도르 바이어와 국산 첫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의 처녀 수출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사진= 정세영 추모집 ‘포니정 나의 삶 나의 꿈’ 캡처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에콰도르에 포니를 수출하려면 홍보가 먼저 이뤄져야 했다. 그런데 당시는 몇 장 안 되는 카탈로그에 의존하는 실정이었고, 카탈로그도 다른 차종 없이 유일하게 포니 하나만 소개 됐을 뿐만 아니라 색상도 노란색, 초록색, 검정색 등 몇 가지 원색에 그쳐 요즘 서울거리를 누비는 수많은 차량 모델과 비교할 때 너무나 초라했다.

미니 산유국의 잠재고객은 메르세데스 벤츠나 미국 차량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근거리 쇼핑몰 등 제2 차량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대상이기 때문에 이 같은 점을 부각시키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한국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워낙 없어 포드 대리점 또는 벤츠 등 고급차 딜러들의 관심을 끌어낼 수 없었다.

다각적으로 수배한 끝에 무역관은 신규 등장한 딜러 중 열성적이고 잠재능력이 있다고 판단된 명문가 곤잘레스 형제 딜러를 발굴했다. 현대차는 이들에게 정책적으로 마진 없는 공급가격을 제시하는 등 시장 진입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택시조합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현대차 담당자들의 눈물어린 정성도 수출에 크게 기여했다.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한국과 에콰도르를 수 없이 오가며 딜러들을 챙겼고, ‘포니 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정세영 현대차 사장도 5차례가 넘게 에콰도르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현대차는 마침내 1976년 7월에 포니 다섯 대를 처녀 선적했다. 비록 다섯 대에 불과했지만 처녀 수출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포니를 처음 수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리한 가격 제시 외에 차 이름값도 한 몫 했다. 일본 소니 전자제품이 시장을 석권했던 것처럼 포니의 발음과 뜻의 친근감이 중남미 바이어들의 관심을 끌어 잡는데 나름대로 기여했다 게다가 영화 리오 브라보에 출연한 딘 마틴이 ‘My rifle, my pony & me’ 주제곡을 불러 포니는 북미, 중남미에서 호감 상표가 되어 있었다.

▷포니 브랜드도 현지인에게 호감

포니의 차체 디자인, 내구성과 튼튼한 재질의 철판 등도 에콰도르 국민들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행운의 사고(?)까지 겹쳐 포니 이미지가 크게 부각됐다.

처음 진출한 택시조합용 포니가 어느 날 일본 마쓰다 자동차와 시내에서 충돌했는데 포니 승객들은 부상 없이 안전했고 차체에도 큰 손상이 없었는데 반해 마쓰다 승객들은 중상을 입고 차체도 크게 파손됐다는 사실이 현지 신문에 크고 상세하게 보도되면서 이를 본 다른 택시조합의 주문이 쇄도했던 것이다.

단기간에 포니의 수요가 증가하자 곤잘레스 형제 딜러는 단기간에 서울 딜러대회까지 참석해 물량확보에 나서는 한편 포니를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곤잘레스 형제는 홍보 과정에서 포니의 독특한 디자인을 이탈리아제로 둔갑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포니를 많이 팔기 위해 이탈리아 자동차라는 선입견이 들도록 홍보를 한 것이다.

이를 본 무역관은 당장 시정하지 않으면 현대 본부에 딜러 교체를 강력히 건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곤잘레스 형제는 즉각 한국제 디자인으로 홍보하도록 원점에서 돌렸다. 당시 한국 ‘꼬레아(COREA)’ 국가 이미지는 신비한 동양의 나라로 나쁘지 않았고, 일본 진출에 따른 간접 이익도 볼 수 있었다.

포니 대리점은 자동차 대리점 활동실적 사상 단기간 내에 최고로 신장해 한국차 대리점의 평판이 좋아졌다. 문제는 차량 공급이 확대될수록 고정 차량의 A/S가 필요해졌으나, 당시 현대차는 A/S 시스템이 아예 없었다.

현대차 지사가 현지에 설치돼 있지 않아 본사 수출부서 소속인 출장인력이 귀국한 후에는 택시조합이 무역관 앞으로 A/S 지원을 요청했다 무역관이 여러 차례 현대 본사에 지급으로 건의해 이동정비 및 A/S팀이 현지에 파견 지원됐다. 그런데 이들을 맞이하러 공항에 마중나간 무역관장 앞에 나타난 지원반은 고작 한 사람, 설상가상 A/S를 위한 기계 공구는 어깨에 둘러맨 더블백에 있는 것과 공구세트에서 꺼낸 몇 점에 불과했다.

A/S팀원이 분주하게 일했지만 하루 의뢰 물량을 모두 소화하기는 태부족이었다. 당시 포니는 튼튼했어도 마무리 작업이 제대로 안 돼 재떨이를 꺼내 청소한 후 다시 집어넣으려면 제대로 맞지 않았고, 문고리 손잡이 테두리의 고무 바킹이 잘 떨어지는 등 사소한 문제들이 많았다.

또한 근본적인 문제점은 중남미인들 중 원주민이 아닌 스페인계 사람들의 체격이 우리보다 우람하고 앉은키도 큰데 포니에 승차해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때 머리가 차 천장에 부딪히는 경우가 적지 않아 이의 시정을 통해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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