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교 9년전 코트라 자카르타 지사 개설 교역활동 본격화
북한의 방해공작 속 ‘선 경제 진출 후 수교’ 선례 남겨

1967년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경제사절단 일행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후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7년 한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경제사절단 일행이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후 걸어나오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베트남 전쟁의 종식이 선언된 1973년까지는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서 냉전체제’와 저개발국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서방 선진국에 대항하는 이른바 ‘남북 갈등’이 심화되는 등 세계질서가 이데올로기에 지배되던 혼돈의 시대였다.

따라서 수출 지상주의를 부르짖던 박정희 정부도 세계시장에서의 ‘이념의 벽’ 때문에 수출 진흥에 근본적인 한계에 골머리를 안고 있었다. 정부는 수출을 신앙처럼 외쳤지만 당시만 해도 해외공관이나 세계무대를 뛰는 우리의 세일즈맨들은 도처에서 북한 측의 방해공작에 부닥쳐야 했다. 수출시장에서의 제품경쟁에다 이 같은 또 하나의 적 때문에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해외진출 초기 북한 때문에 골치

외국 공항에 내려 택시를 잡고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Korean Embassy(한국대사관)’라고 말했더니 운전사가 북한 대사관 앞에 내려주었다는 초기의 수출시장 개척담은 수도 없이 많다. 특히 지난 1971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농협 무역부장 피랍 사건’은 해외시장에서의 당시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해 가을 당시 전례 없는 고추흉작으로 파동 조짐이 보이자 정부는 인도네시아산 고추 수입을 타진하기 위해 당시 농협 무역부장 신외식 씨를 현지로 급파했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에 위치한 라마야나시티 호텔에 숙소를 정한 신 부장은 곧바로 총영사관에 도착 소식을 알리기 위해 호텔 교환원에게 ‘Korean Embassy’와의 전화통화를 부탁했다. 그러나 호텔교환이 전화를 연결해 준 곳은 북한 대사관이었다.

북한 대사관측은 한국 대사관으로 위장하여 신 씨의 숙소를 파악해놓고 요원 2명을 보내 신 씨를 납치했다. 유도 6단이었던 신 부장은 북한 대사관까지 끌려갔으나 현관에 내리자마자 납치 요원들을 밀어제치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그 후 우리 기업체의 해외 파견 요원들에 대한 국가안전기획부의 사전 안보교육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대표적인 케이스로 꼽혀 교육자료로 활용되기도 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29개국으로 구성된 소위 ‘아·아그룹’에서 인도와 함께 맹주국으로 부상해 있던 인도네시아는 이미 북한과 1964년부터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돼 있었다. 아·아그룹은 비록 비동맹 중립노선을 기치로 내걸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으며, 한국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적은 상황에서 자카르타에서 볼 때 ‘Korean Embassy’는 북한 대사관으로 오인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

따라서 박 대통령은 1960년대 중반 아세안(ASEAN‧동남아 국가연합) 5개국을 순방하는 등 동남아국가들과의 외교 및 경제협력 증대방안을 적극 모색했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비동맹그룹에서 갖는 상징적 의미가 클 뿐 아니라 원목 등 현지의 풍부한 자원을 확보해 국내 수요에 안정적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차원에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국교 수립을 추진했다.

결국 정부 차원에서의 수차례에 걸친 공식, 비공식 접촉 끝에 1973년 9월 18일 양국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같은 해 11월 1일 중립국인 라오스, 12월 5일에는 인도, 12월 18일에는 방글라데시 등과 차례로 대사급 또는 통상대표부 개설 형태의 외교관계가 수립됐다. 북한의 입김으로 눈치를 봐야했던 비동맹국들과의 교역도 활기를 띠게 되는 전기가 마련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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