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레이건 대통령 방한해 32개 품목 시장개방 요구
이듬해 사상 최대 규모 구매사절단 파견해 33억 불 쇼핑
1987년 대미 무역흑자 97억 불 달하자, ‘제2의 일본’ 불만 표출
‘슈퍼 301조’ 통과시켜 지금까지도 통상 압박 무기로 사용

1983년 12월 1일 방한중인 도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 대통령에게 32개 품목의 시장개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보다 적극적이고 강하게 한국에 통상압박을 가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983년 12월 1일 방한중인 도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 대통령에게 32개 품목의 시장개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보다 적극적이고 강하게 한국에 통상압박을 가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컬러TV 덤핑 제소 건으로 한·미 간 관계가 서먹해진 1983년 11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감귤류, 컴퓨터, 담배, 자동차 등 32개 품목의 시장개방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수량규제 및 덤핑, 상계관세 제소를 통한 수입규제에 치중했던 미국이 시장개방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84년 2월, 정부는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구매사절단을 구성해 미국으로 보냈다. 당시 금진호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고 교체 단장에 정주영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등 그룹 회장만 8명이 포함된 명실공히 대규모 사절단이었다.

컬러TV의 재심 예비판정이 원심보다 5배나 높게 발표된 직후에 출국한 이 사절단은 미국 내에서도 대한국 시장개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동남부지역을 중심으로 15개 도시를 9일간 돌며 33억 달러라는 구매실적을 올렸다. 초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미국언론은 이들의 구매 규모가 예상을 뛰어넘자 연일 지면에 대서특필했다. 지역구민을 의식한 한 상원의원은 대표단에 은밀히 전화를 걸어 구매 일정과 실적을 자신에게 먼저 알려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정부 측 통상 실무자들이 겪은 고초도 많았다. 1984년 5월 유럽국가들과의 통상장관 회담을 위해 출국한 상공부 금 장관과 통상 관계자들은 낮에는 통상장관 회담을 하고 밤에는 서울과 워싱턴에 전화를 걸어 컬러TV 문제에 매달려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맬컴 볼드리지 당시 미 상무부 장관이 로데오 경기에 참가했다가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며 집에서 전화도 받아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파리에서는 기독교를 믿지도 않는 금 장관이 박운서 상공부 차관보에게 저녁 식탁에서 기도를 부탁했다. 그때 박 차관보는 기도 중에 “···컬러TV 재심청구가 수락되도록 도와주시고···”라는 구절을 잊지 않았다.

미국의 공세는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컬러TV와 앨범의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85년 9월 미국은 한국에 보험시장 개방을 요구하며 무차별 보복을 의미하는 미 통상법 301조 발동을 발표했고, 연이어 10월에는 물질특허를 비롯한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해 제2차 301조 발동을 발표했다. 한·미 통상마찰이 정점을 향해 줄달음쳤다.

일본, 대만은 물론 EC(유럽공동체)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쌍무협상에 응했고 대만은 제소 2개월 만에 백기를 들었다. 이 상황에서 2년여를 끈 ‘301조 협상’은 그 당시 가장 지루하고 어려웠던 한·미 간 통상협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보험협상에 참여했던 경제기획원의 해외 협력위원회의 담당자들은 “옷을 벗지 않으면 강간을 당할 판”이라고까지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지식재산권 협상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초임사무관으로 밀실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던 지식재산권 협상에 참여했던 한 통상 관계자는 “공무원 생활 중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라면서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면서 미국 측의 끝없는 요구를 들어야 했고 그때마다 한 꺼풀씩 옷을 벗듯 내주는 형국이었다”라고 밝혔다.

1987년 미 상무부 통계로 우리나라의 대미무역수지 흑자가 94억 달러에 이르자 한국은 미국의 지식인들 사이에 ‘제2의 일본’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나선 리처드 게파트 의원은 미국산 자동차의 한국 내 판매가격이 지나치게 비싼 것을 비난하는 내용의 TV 광고까지 냈다. 서울에서 올림픽 준비에 여념이 없던 1988년, 미 의회는 1년여의 논란 끝에 전가의 보도로 일컬어지던 301조보다 더욱 강력한 ‘슈퍼 301조’가 포함된 종합무역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를테면 장난감을 덤핑해도 자동차는 물론 다른 어떤 품목의 수입도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었다.

미국은 그 후 걸핏하면 슈퍼 301조를 들먹이며 시장개방을 요구해왔고 예봉을 피하기 위한 정부와 업계의 통상 관계자들은 미국을 고향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당시 상공부 대미통상 담당 국장이었던 황두연 씨(전 통상교섭본부장)는 1년의 절반 이상을 미국 출장으로 보냈다.

1990년대 들어서도 대미무역수지가 적자행진을 계속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92년에는 미국 내에서 사료용으로 사용하는 대구 머리를 우리 교민들이 잘 먹는다는 이유로 이 품목에 대한 시장개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양국 간 통상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맡는다. 이어 미국의 무역적자 확대와 더불어 자동차, 쇠고기, 의약품, 지식재산권, 영화, 농산물, 통신 등으로 확대된 것이다. 2004년 쌀 개방 협상은 조용히 넘어가는 듯했으나 곧이어 쇠고기 수입 이슈가 불거지면서 한국은 국론이 분열되는 아픔까지 거쳐야 했다. 지난 2007년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반대급부로 한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으나 광우병 이슈가 불거지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2008년 상반기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수십만 국민이 참여하는 촛불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금융위기로 자동차 빅3의 파산 위기까지 겪은 미국은 2009년 취임한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바이 아메리카’를 내세워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하면서 한국에 대한 통상 압박을 늦추지 않았다. 2016년 당선 후 취임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한술 더 떠 한-미 FTA의 파기를 언급하고,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내세워 한국을 끝없이 자극했다.

아직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았으나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민주당 존 바이든의 당선이 유력하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낸 바이든 당선자는 그때의 통상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할 것이 유력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이든 당선자의 제1 공약은 자국의 경제·산업의 부흥이다. 전통적으로 통상 부문에 있어 보호주의 색채가 강한 민주당이 집권함에 따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통상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우려된다. 적어도 통상에서는 한국과 미국 사이에 ‘혈맹’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