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이어 유럽, 호주 등 한국에 통상압박 국가들 증가
국가 지킨다는 사명에 공무원들 필사적으로 방어 나섰지만
힘센 부처간 알력 충돌, 낮은급 전담기관이 조절하기엔 한계
공직 떠나는 공무원 증가하면서, 전문가 부족 사태 해소 안돼

1989년 11월 13일 과천 상공부 청사에서 열린 ‘제4차 한·미 섬유협상회의’에서 한국(오른쪽)과 미국 협상팀원들이 그해로 끝나는 양국의 섬유협정 연장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989년 11월 13일 과천 상공부 청사에서 열린 ‘제4차 한·미 섬유협상회의’에서 한국(오른쪽)과 미국 협상팀원들이 그해로 끝나는 양국의 섬유협정 연장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서울와이어 채명석 기자] ◆외곽 때리는 기교로 성공 거둔 협상

1985년에 열렸던 호주와의 통상장관 회담은 외곽을 때리는 기교로 성공을 거둔 보기 드문 경우다. 이때 한국 측 대표로 호주를 방문한 금진호 당시 상공부 장관은 호주의 도킨스 통상장관과는 1년 사이에 네 번째 만나는 것이었다. 호주 측에서는 전례가 없는 장관의 공항 영접으로 우정을 과시했으나 협상은 협상이었다. 1973년 이래 추진해 온 대한항공의 시드니 취항권을 따내기 위한 협상이었다.

금 장관은 호주 교통 장관의 회담과는 별도로 농산물, 철광석, 석탄 등을 담당하는 케린 1차 산업 장관을 만나 취항권을 허락하지 않으면 1차 산품을 다른 나라에서 사는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음 해 3월 만료될 예정인 원료탄 계약에 대한 상담을 포항제철(현 포스코) 측에 회담이 끝날 때까지 중지토록 지시해 놓았고 케린 장관도 이를 알고 있었다.

협상 마지막 날 도킨스 장관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서 금 장관과 마주 앉았다. 이들은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우며 담판을 계속했다. 다음 날 아침 호주 측은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고 항공협정 체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위한 한국 정부와의 항공실무회의를 연내에 개최한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1986년에 열린 캐나다와의 섬유 협상은 서울에서의 3차 협상을 앞두고 캐나다의 원자력발전업체인 캔두사가 한국전력의 입찰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원자력 협상이 돼버렸다. 캐나다의 협상 대표가 서울에 3차 협상을 위해 왔을 때 통상당국은 섬유 협상에 앞서 이들에게 동력자원부 및 한전의 원전 관계자들과의 회의를 주선해야 했다. 협상은 당초 예정의 2배로 늘어난 6일간이나 계속됐고 협상 대표들은 원자력의 불똥이 섬유에 튀지 않도록 막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담배 끊고 100만 달러 규제 해제 성과도

1987년 서울에서 열렸던 스웨덴과의 섬유 협상은 재미있는 타협이 이뤄진 경우다.

스웨덴 측 협상 대표는 협상 장소에서 연거푸 담배를 피워대는 당시 한국 측 협상 대표 박운서 상공자원부 제1 차관보에 담배를 끊으라고 권유했다.

박 차관보는 “내가 담배를 끊으면 협상에서 무엇을 주겠느냐?”고 농담을 던졌다. 스웨덴 측 대표는 “규제 품목 수를 줄여주겠다”라고 말하고 금연 약속을 합의각서로 제출할 수 있겠느냐고 다그쳤다. 박 차관보는 그대로 했고 스웨덴 측 대표는 이를 보고 웃으며 찢어버린 뒤 약 100만 달러에 달하는 품목의 규제를 풀어줬다. 박 차관보는 실제로 그로부터 10여 일간 담배를 끊었다.

EC(유럽공동체, 현 유럽연합)가 1986년에 요구한 미국과 동등한 지식재산권 보호는 미국과의 협상이 끝나는 순간부터 예견돼온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국내 관련 부처 간의 이견으로 거부했다가 1988년 1월부터 일반특혜관세(GSP) 혜택을 중단당하는 사태를 맞았다. 통상협상 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연간 1억 달러의 수출 감소가 당장 현실로 다가왔다.

외무부와 상공부는 동등 대우 허용을 통해 GSP 수혜 정지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는 안보 측면 등 한·미 간의 특별한 관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버티자는 의견이었다. 결국, 정부는 기획원과 재무부의 의견을 따랐고 결과는 최악이었다. 그 후 수년간 벌어진 협상에서 정부는 결국 EC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 부족해 매번 협상마다 수세 몰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과정에서도 지적됐듯이 통상협상 전문가의 부족과 취약한 협상 능력은 미국, EC 등과의 통상협상에서 번번이 수세에 몰리는 원인이 됐다. 특히 치열한 설전으로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선진국의 통상전문가들과의 회담은 영어 구사 능력에서부터 열세인 우리 대표들에게는 고역 그 자체로 표현된다.

다자간 통상협상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처음 제네바에 부임해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서 열리는 협상에 들어가 보니 협상은커녕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들은 6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제대로 업무수행이 가능해져 통상전문가 육성의 부재로 인한 피해는 심각했다고 한다.

더욱 큰 문제는 향후에도 통상전문가의 육성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공무원이 평균 1~2년에 한 번씩 부서를 옮겨 전문 분야를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네바에서도 한국은 협상 대표들의 빈번한 교체로 유명했다. 통상협상은 협상의 기교뿐만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 되는 산업이나 품목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필수적이다. 해마다 부서를 옮겨 다니는 공무원들이 특정 분야에 전문지식을 쌓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협상력이 강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에 가까웠다.

거듭된 성공과 실패의 경험으로 1980년 이후 10여 년간의 본격적인 통상협상들은 우리에게 교역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수출로만은 이뤄질 수는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또 전문가의 육성을 통한 협상력의 강화 필요성은 2000년대 들어 통상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다자주의 개방 협력의 대표적인 기구인 WTO(세계무역기구)의 위상이 추락하면서, 미국과 중국 등 G2가 주도하는 양자주의, 쌍무주의 성격의 지역무역협정(RTA)가 득세하는 등 전 세계 통상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고 있다.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한국은 이러한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통상 담당 기구와 전문가 풀은 여전히 부족하다. 통상교섭본부라는 별도 조직으로 존재했으나 본부장이 차관급이라 외교부와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힘이 센 부처들에 치여 타 부처들과의 조율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나마도 다시 산업부로 흡수되어 예전처럼 담당 직원들의 잦은 교체로 전문성도 떨어졌다고 한다.

무역으로 국가 부의 상당 비중을 창출하는 한국은 여전히 통상 부문에서 경제력에 비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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