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산에 소재한 중견 조선업체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책은행에서 파견한 채권단 단장과 물품‧자재 구매 담당 직원이 언성을 오가며 싸웠다고 한다.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기업 내에서는 채권단장이 실무 직원에게 직접 시비를 걸지 않고, 실무 직원도 상사가 보는 앞에서 채권단장에 들이대지 않는 불문율이 있는데, 그날 그곳에서는 대놓고 폭발했다.

직원들이 뒤늦게 알게 된 그 날 충돌의 이유는 ‘150원’ 때문이었다. 관리 기업으로 파견간 채권단장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매일 회사 재무담당 직원이 올리는 비용지출 명세를 검토하고 결재도장을 찍어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 받은 결재서류에 기재된 화장실용 두루마리 화장지 구매가격이 채권단장이 보기에 높아 보였다는 것이다. 그가 직접 스마트폰으로 전자상거래 앱을 접속해 제품과 가격을 검색해보니 비슷한 길이와 품질의 화장지가 한 롤당 150원이 더 쌌다는 것이다. 왜 150원 더 비싼 화장지를 구매하느냐고 다그쳤고, 담당 직원은 공개입찰 절차를 통해 복수의 업체의 제안서를 받아 표본을 가지고 비교한 뒤 품질과 가성비가 가장 우수한 품질이 더 좋은 것을 고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권단장은 막무가내였고, 담당 직원도 적절한 절차를 거쳤다며 맞서다가 결국 서로 감정이 터졌다.

끝까지 담당 직원의 말을 믿지 않은 채권단장은 회사에 두 제품을 직접 비교해 본 뒤 사진을 찍어 보고하라고 했다. 그래서 직원들은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 조선소 한가운데에서 두 회사의 두루마리 화장지를 길게 풀어 길이를 쟀다. 채권단장이 말한 150원 싼 화장지 길이가 더 길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구매한 화장지보다 두께가 얇아 한 번 볼일(?)을 볼 때마다 더 많은 칸의 화장지가 소모되어 전체 구매비용이 더 들었다. 이러한 결론을 사진까지 찍어 보여줬더니 그제야 채권단장은 알았다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자금이 투명하게 사용되는지를 점검하고 감독하는 채권단장의 지나친 열정에서 비롯된 헤프닝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다. 과연 그럴까?

채권단장이라는 사람들의 생리를 좀 더 살펴보자. 채권단장은 서울과 사업장을 연결하는 중간책으로, 본점에서 마련한 구조조정 시책이 사업장에서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감독하고, 운영자금의 흐름을 관리하고 집행을 결정한다. 대표이사나 최고재무책임자(CFO)도 자의적으로 자금을 쓸 때는 늘 채권단장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심지어 이들이 채권단이 내려보낸 전문경영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채권단장은 본점을 권한을 위임받아 무소불위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

관리 기업의 성공적인 부활을 위해 헌신하는 채권단장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례가 훨씬 많다. 채권단장이 파견해 꼼꼼히 관리했는데 오히려 경쟁력이 소멸해 문을 닫는 기업이 많다는 거다. 이상한 일이다.

객관적으로 이렇다고 할 순 없지만, 그동안 기자가 수많은 채권단 관리 기업을 취재하면서 느낀 점을 말하자면, 관리 기업이 문을 닫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채권단장에 대한 불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채권단장은 국책은행 소속으로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관리 기업으로 파견가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은 ‘가기 싫은데 조직에서 시키니’ 내려왔다. 억지로 내려왔으니 관리 기업에 정이 안 가고, 업종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업무를 진행하면서 직원들에게 배우지만 이미 금융 논리가 머리와 몸에 밴 채권단장은 들어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하루라도 빨리 본점으로 복귀하는 게 꿈이니 자신이 부임하고 있는 기간 동안 그 어떤 사고도 나서도, 언론에 부정적인 보도가 나오거나 지역민들에게 비난받는 일이 절대로 벌어져선 절대 안 된다. 스스로 이건 잘못됐다고 느끼지만, 괜히 사달을 일으킬까 두려워 무조건 본점에서 시키는 것만 시키는 대로 한다. 본점으로 복귀해 영전하려면 성과를 내야 한다. 큰돈이 드는 사안은 본점이 직접 진행하니 이들은 50만~100만 원 수준인 소액의 운영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트집을 잡는다. 소소한 낭비 여지를 발견하고 개선한 사람이 성과를 인정받아 포상받는 관행을 잘 알기에, 이들은 사소한 것에 끊임없이 목숨을 건다.

‘150원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가뜩이나 중소 조선사들의 경영난 때문에 골치가 아픈 채권단들은 기업이 죽건 말건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푼돈을 아끼려다가 더 큰 돈을 날리게 마련이다.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데에만 집착하면 더 큰 화를 입는다. 그날, 이 조선소에서는 화장지 길이를 재고 두께를 재느라 복수의 직원이 업무시간에 본연의 책무를 못 했다. 자재가 쌓여있고, 그 자재를 운반하고 선박을 짓는데 사용하는 장비가 이동하는 조선소 안에서 화장지를 비교하는 만큼의 공간을 낭비했다. 시간과 비용 낭비다. 실체가 보이지 않지만, 기회비용을 낭비한 책임은 이를 지시한 채권단장에게 있는데, 그는 과연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까?

그런 장면을 목격한 직원들의 떨어지는 사기는 어쩔 것인가. 채권단장은 기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고 호소하지만, 직원들이 보기에는 ‘저승사자’이자 ‘슈퍼 갑’이고, 그들이 벌이는 일은 갑질이다. 채권단 관리를 경험했거나 관리 받는 조선사 직원들 누구나 붙잡고 질문하면 100% 그렇다고 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산을 마구 팔아버리고, 임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일부분만 지급하라는 등 회사를 살리기 위해 성의를 보이라고 하면서 약속한 자금 지원은 인색하다. “지원 분야 이외에 문제는 조선사 스스로 해결하라”라면서, 말을 안 들으면 자신들이 선임한 전문경영인을 내쫓거나, 자금줄을 막아 회사를 무너뜨린다.

기자는 올해로 조선업계를 담당한 지 만 10년을 넘겼다. 업계를 맡자마자 닥친 불황으로 인해 지난 10년간 채권단과 관리 기업 간 마찰을 수없이 목격했고, 실제로 수많은 조선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 순간은 채권단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해 응원의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니,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채권단의 행태는 개선된 것이 없었다.

“그들(금융기관 채권단)은 바뀌지 않아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노력했는데, 모든 게 끝나고 되돌아보니 헛수고만 했습니다.” 채권단 관리 기업에 근무하다가 물러난 조선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채권단장의 말과 행동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결국 채권단의 그것이다. 채권단이 어떻게 기업을 옥죄고 있는지를 다시 짚어보고 해결안을 모색해야 한다.

산업부장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