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 참여 조건, 현지 거점·공동구매팀이 관건
EU '바이 유러피언' 원칙, 한국 기업 앞길 가른다

[서울와이어=최찬우 기자] 유럽연합(EU)이 1500억유로(약 245조원) 규모의 무기 공동구매 프로그램을 출범시키면서 한국 방산업계가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유럽시장은 동시에 높은 진입 장벽을 동반한다. 이미 현지 공장을 세우거나 합작사를 설립한 기업은 수혜가 기대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은 유럽 진출 문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21일 방산업계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이달 폴란드 WB그룹과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 폴란드형 다연장로켓 ‘호마르-K’에 탑재되는 80㎞급 유도탄을 현지에서 생산하기로 했다.
현대로템도 폴란드와 체결한 K2 전차 2차 계약 물량 180대 중 일부를 폴란드 국영 방산업체 PGZ와 협력해 ‘K2PL’ 버전으로 현지 생산할 예정이다.
이 같은 현지화는 EU 세이프(SAFE) 프로그램 참여의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세이프 규정상 제3국 기업이 공동구매에 참여하려면 유럽 내 생산시설을 갖춰야 하고 최소 두 개국 이상과 공동구매팀을 구성해야 한다.
반면 유럽 내 생산거점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불리할 수 밖에 없다. EU는 무기 조달 시 부품의 65% 이상을 역내에서 조달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예외를 인정받으려면 EU 집행위와 별도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일부 기업은 단기적 실적 확보에 성공했더라도 장기적 수익성 확보는 또 다른 문제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공장을 세우더라도 협력업체와 인력이 부족해 안정적인 생산체계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EU 예산 배분도 국가별 상황에 따라 달라져 불확실성이 높다”고 말했다.
EU는 이번 공동구매 제도를 ‘가장 개방적인 방위 프로그램’이라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바이 유러피언(Buy European)’ 기조가 힘을 얻는 양상이다. 유럽 주요 방산기업도 반격에 나섰다.
독일 라인메탈은 기존 지상군 장비 중심에서 벗어나 해양·항공·우주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기업들도 대형 공동 프로젝트 참여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방산업계은 한국 기업이 가격 경쟁력과 납기 우위에만 기대서는 한계가 있다고 내다봤다. 유럽 방산 산업은 과거보다 약해졌다는 평가에도 여전히 튼튼한 기반을 갖췄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전통 강국들이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며 역량을 키우는 상황에서 한국 기업이 단순한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승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기술 고도화와 현지 협력을 동시에 추진해야만 한국 방산업체들이 유럽 무기시장에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번 세이프 프로그램은 한국 방산업계에 기회이자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현지화 투자를 단행한 기업은 시장 확대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은 역내 규제와 현지 기업 경쟁력 강화 속에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