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아들인 창업회장-명예회장 간 갈등 수면위로
50세 김 회장 지난 6월 명예회장으로 갑작스런 추대
창업 회장 살뜰히 챙긴 장녀에게 후계 무게추 가능성

[서울와이어=천성윤 기자] 재계 서열 40위인 DB그룹이 난데없이 아버지와 아들이 경영권을 두고 갈등설이 불거져 배경에 관심이 모인다. 김준기 창업회장이 김남호 명예회장 대신 딸인 김주원 부회장을 새 후계자로 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다.
2일 재계에 따르면 DB그룹은 김준기 창업회장의 측근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그룹을 이끌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6월 DB그룹 회장에 오른 전 DB손해보험 사장 이수광 회장이다. 이 회장은 1979년 DB그룹에 합류해 오랜 기간 김준기 명예회장 곁을 지킨 최측근 인사다. 1944년생으로 김 창업회장과 동갑인 데다가 DB그룹의 역사와 함께한 인물이기 때문에 신임이 두텁다.
DB손해보험, DB증권, DB하이텍에서 각각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정남 보험그룹장, 고원종 금융사업그룹장, 이재형 제조서비스사업그룹장도 김 창업회장과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왔다.

김남호 명예회장과 그의 측근들은 김 창업회장이 2017년 가사도우미·비서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문제로 회장직에서 사임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그룹 주도권을 잡았다. 다만 2021년 김 창업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면서 상당수가 회사를 떠나는 등 힘이 빠진 상태로 알려졌다. 지주사인 DB에 남아있던 마지막 부사장급 인사도 최근 경질됐다.
김준기-김남호 부자의 갈등이 시작된 시점은 김 창업회장이 비서 성추행 문제가 제기되자 2017년 7월 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떠났을 때다. 경찰은 그가 사실상 도피 행각을 벌인 것으로 간주하고 같은 해 11월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신청하고 여권도 무효화 했다. 하지만 김 창업회장은 현지에서 이민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 6개월 단위로 체류자격을 연장하는 등 2년 넘게 한국에 오지 않았고, 이에 경찰이 미국에 범죄인 인도 청구를 요청하는 등 DB그룹 명성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김 창업회장이 그룹에 부재했을 동안 김 명예회장은 창업회장의 측근들과 갈등이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게다가 2021년 김 창업회장의 부인이자 김 명예회장의 어머니인 김정희 여사가 별세하자 장례 문제를 놓고도 크게 다퉈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딸인 김주원 부회장이 미국에 있는 아버지를 극진히 챙기면서 후계 구도도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경영에 있어서도 두 사람은 이견을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DB그룹은 2021년 반도체 파운드리 계열사인 DB하이텍을 국내 대기업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좌초한 바 있다. DB하이텍은 김 창업회장이 큰 애착을 갖고 오랜기간 투자하고 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매각 결정에 반대했다”는 말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이 사건 직후 김 창업회장은 DB 지분을 11.61%에서 15.91%로 올리며 ‘왕권’을 강화했다.
이러한 DB그룹 내 갈등은 지난 6월 김남호 회장이 추대 5년 만에 명예회장으로 직함이 변경되며 대외에 알려졌다. 김 명예회장은 1975년생으로 올해 50세에 불과하지만 통상 현역 은퇴를 의미하는 명예회장직에 올라 사실상 ‘밀어내기’라는 관측이 나왔다. DB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하기 위함이라고 밝혔지만 김 명예회장은 이미 김 창업회장이 2021년 미등기 임원으로 경영에 복귀한 시점부터 주요 결재라인에서 빠진 상태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눈 밖에 났다는 의견에 힘이 실렸다.

여기서 주목받는 인물은 김주원 부회장이다. 그는 1남 1녀중 장녀로 김 명예회장의 누나다. 김 창업회장은 20여 년 전인 2004년 비금융계열 지주사 역할을 하는 DB(옛 동부정밀화학) 지분을 김 명예회장에게 21.14%, 김 부회장에게 11.21% 증여해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는 의지를 보인 바 있다.
하지만 부자 갈등이 심화한 현재 상태에서 김 창업회장이 보유한 지분 15.91%와 김 부회장이 보유한 지분 9.87%를 합한 25.78%의 지분으로 김 명예회장 배제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재계에서는 김 명예회장에게 아들이 없는 점도 김 창업회장이 후계 구도를 고민한 지점으로 추측한다. 김 명예회장은 차광렬 차병원그룹 연구소장의 장녀인 차원영씨와 결혼했고 현재는 딸만 한 명이 있다. 반면 김 부회장은 슬하에 두 아들이 있다. 김 창업회장의 두 손자는 DB금융그룹에서 인턴 생활을 하는 등 미래에 경영 참여를 염두 한 행보를 보인다.
일각에서는 부자 갈등이 극한으로 치닫으면 DB그룹이 계열 분리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DB그룹은 DB손해보험을 중심으로 한 금융 계열사와 DB를 중심으로 한 비금융 계열사로 나뉘는데, 금융은 김 명예회장이 가져가고 비금융은 김 부회장이 맡는 구조가 거론된다.
여기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재계 관계자들은 김 창업회장이 이미 사이가 틀어진 김 명예회장에게 핵심 계열사를 맡기는 작업은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부자 관계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김 창업회장이 김 명예회장을 2027년 3월 사내 이사에서도 물러나게 해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배재 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공통된 의견은 김 창업회장이 여전히 그룹 내 지배력이 막강한 만큼, 그의 의중과 최종 결심이 DB그룹의 향후 권력 구도를 정리하리라는 추측이다.
DB그룹 관계자는 “김 명예회장이 지분 경쟁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며 “경영권 분쟁 가능성은 있을 수 없다”고 갈등설을 부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