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억원 청구했지만 3분의 1만 인정”

[편집자주] 서울와이어는 비즈앤로(Biz&Law) 코너를 통해 한국 기업이 전 세계를 누비면서 벌어지는 각종 비즈니스 소송을 심도 깊은 취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생소한 해외 법적 용어와 재판 과정을 알기 쉽게 풀어내 국내 산업계가 마주한 글로벌 법적 리스크를 분석하고, 향후 전망까지 예측하고자 합니다.

삼성E&A 본사 사옥 전경. 사진=삼성E&A
삼성E&A 본사 사옥 전경. 사진=삼성E&A

[서울와이어=황대영 기자] 삼성E&A와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 사이펨(Saipem)이 페트로팩(Petrofac) 구조조정 관련 소송에서 소송비용 200만 파운드(약 38억원)를 건졌다. 총 소송비용 640만 파운드(약 120억원) 가운데 60%에 해당하는 375만 파운드(약 70억원)를 가집행해달라고 청구했지만, 법원은 “합리적 정당화가 부족하다”며 이를 대폭 축소했다.

현지시간 8월 14일 영국 항소법원은 삼성E&A와 사이펨이 페트로팩을 상대로 청구한 소송비용 640만 파운드 중 60% 가집행 청구를 기각하고, 페트로팩이 200만 파운드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페트로팩이 제시한 50만 파운드(약 10억원)보다 많지만, 청구액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번 사건의 출발점은 영국 고등법원이 지난해 말 석유·가스 서비스 기업 페트로팩의 구조조정안을 승인한 판결이었다. 페트로팩은 아랍에미리트(UAE) 자회사를 포함해 막대한 채무를 재조정하는 계획을 영국 법원에 제출했고, 올해 초 1심에서 승인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삼성E&A와 사이펨은 보유한 10억 달러(약 1조4000억원) 규모 채권이 사실상 소멸될 위험에 처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두 회사는 구조조정안이 특정 투자자와 신규 자금 제공자에게 과도한 이익을 몰아주고, 기존 채권자들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양사는 영국 항소법원에 항소를 제기했고, 지난 7월 법원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 결정을 취소했다.

본안에서 승소한 삼성E&A와 사이펨은 곧바로 소송비용 배상 문제를 제기했다. 영국 민사소송규칙(CPR)에 따르면 패소한 당사자가 상대방의 합리적 소송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에 따라 법원도 페트로팩 측이 삼성E&A와 사이펨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삼성E&A와 사이펨이 페트로팩을 상대로 소송비용 청구에서 상당 부분 감액 결정됐다. 사진=영국 항소법원
삼성E&A와 사이펨이 페트로팩을 상대로 소송비용 청구에서 상당 부분 감액 결정됐다. 사진=영국 항소법원

문제는 청구금액에서 발생했다. 삼성E&A와 사이펨은 영국 로펌(마이어 브라운), 변호인단(앤드류 쏜튼 KC 등), 재무자문사(알바레즈 앤 마살) 등의 비용을 합산해 총 640만 파운드를 청구했다. 이 가운데 60%인 375만 파운드를 중간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페트로팩 측은 “소송이 고작 8일간 열렸는데, 해당 비용은 과도하다”며 50만 파운드만 지급하겠다고 맞섰다.

삼성E&A와 사이펨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마이어 브라운의 파트너 변호사들은 시간당 1096파운드(약 206만원)까지 청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청구서는 단순히 “프로젝트 오일 관련 전문 서비스 제공”이라고만 기재돼 있었고, 구체적인 업무 내용이나 시간 배분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법원은 “가이드라인 시간당 요율(Guideline Hourly Rates)의 두 배 수준이지만, 국제적 요소나 소송의 복잡성이 어떻게 반영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마이어 브라운이 실제로 고객에게 상세 내역을 제공했음에도 법원에는 비특권 요약조차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재무자문사가 청구한 ‘금융 자문(Financial Advisory)’ 비용도 쟁점이었다. 이 비용은 단순히 “자문 서비스 제공”이라는 설명만 있었을 뿐, 어떤 분석을 했고 어떤 방식으로 요율이 산정됐는지 알 수 없었다. 법원은 “채권자들이 구조조정의 재무적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 전문가 자문을 받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으나, 세부 설명이 전무한 비용은 회수 가능성이 제한된다”고 밝혔다.

다만 같은 회사가 작성한 ‘전문가 증언(Expert Evidence)’ 보고서는 일부 인정될 가능성이 열렸다. 예컨대 알바레즈 앤 마살의 존스턴 보고서는 페트로팩의 구조조정 후 주식 가치 상승 효과를 분석해 “신규 자금 제공자에게 과도한 이익이 돌아갔다”는 삼성E&A·사이펨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법원은 이 보고서를 “법원이 사건의 핵심 쟁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분석”이라고 평가했다.

법원은 이번 소송비용 판결에서 페트로팩의 논리에 더 무게를 두었다. “상대방이 자기 변호사에게 얼마를 지급했든, 상대 당사자에게서 회수할 수 있는 것은 ‘합리적으로 필요했던 최소 비용’”이라는 원칙을 재확인하며, 삼성E&A·사이펨의 대규모 청구를 상당 부분 제외했다. 실제 판결문에도 “법원이 비용을 합리적·비례적 수준으로 통제하지 않는다면, Part 26A 제도(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하는 절차)는 실질적 효용을 잃게 될 것”이라는 구절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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