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2주 채 안된 시점에서 양국 '삐걱'
'마스가' 등 3500억달러 대미 투자 예정
정부, '전문직 H-1B' 등 비자문제 해결 나서야

미국 이민 당국이 지난 4일(현지시간) 공개한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사진=ICE 홈페이지 영상 캡쳐
미국 이민 당국이 지난 4일(현지시간) 공개한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서 벌인 불법체류·고용 단속 현장. 사진=ICE 홈페이지 영상 캡쳐

[서울와이어=천성윤 기자] 미국 조지아주(州)에서 가동 중인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300여명의 한국인들이 불법체류로 적발·구금된 가운데 비자 문제가 향후 대미 투자 핵심 걸림돌로 작용할 조짐이 보인다. 업계에서는 조 단위 투자를 진행하는 만큼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 측과 비자 문제를 확실히 매듭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8일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미 이민세관단속국(ICE)과 국토안보수사국(HSI)의 단속에 따른 한국인 구금 사태는 ‘자진 출국’ 약속을 받고 석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며 조기에 해결되는 수순이다. 이날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관련 부처와 경제단체, 기업의 신속한 대응 결과 구금된 근로자의 석방 교섭이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현재 체포된 300여명의 한국인은 대부분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구금시설에 머무르고 있다. 이곳은 과거 열악한 시설로 지적받은 바 있어 정부는 이들이 최대한 빨리 풀려나는 것을 목표로 미국과 협의를 이어왔다. 이들은 이르면 오는 10일 정부가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귀국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당분간 미국 현지에 진출했거나 진출할 예정인 국내 기업 분위기는 얼어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경제·안보 분야에서 건설적 논의를 진행하며 우호를 다진 지 불과 2주도 안된 시점에 실탄으로 무장한 인력이 한국인을 대규모로 체포하는 험악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사태의 배경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불법 이민자 단속과 관련해 성과를 내려는 정부 기관의 정치적인 이유가 자리 잡고 있었던 만큼 예측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국 기업은 당장 이번 주부터 출장을 줄취소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미국 출장은 긴급·필수가 아니면 보류했고, LG에너지솔루션도 임직원 출장을 전면 중단하고 현재 나가 있는 인력도 귀국을 지시했다. SK온도 조지아주에 완공을 앞둔 배터리 공장 현장에 사태 이후 일부 인력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의 핵심인 취업비자에 대해 한국 정부와 기업은 그동안 꾸준히 미국에 비자 쿼터(할당량) 확대를 요청해 왔다. 국내 기업의 미국 법인에서 합법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E(상사 주재원이나 투자사 직원), H(임시 근로자), L(일반 주재원) 비자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주재원(L1·E2) 비자 취득 조건은 극도로 까다롭다. 결국 전문직에 종사하는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H-1B 비자가 필요하지만, H-1B 취득은 매년 3월 한시적으로 시행되는 추첨제여서 실제 취득률은 10%도 안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업 현장에서는 근로자가 ‘ESTA’(전자여행허가)를 받고 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국내 전문 인력을 필수로 파견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식 비자를 수개월에 걸쳐 받는 것은 일정상 불가능하다. 또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비자 발급이 더 엄격해지고 심사 기간이 늘어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이에 업계에서는 비자 관련 사항은 민간에서 어떻게 할 수 없고, 정부가 적극 나서서 풀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측에 투자 규모에 걸맞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미국 특별 취업비자를 받고 있다. 캐나다와 멕시코의 경우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에 무제한 비자를 발급한다. 싱가포르는 FTA(자유무역협정) 전문직 비자인 ‘H-1B1’을 연간 5400개 발급받고 있으며 호주는 별도 법안 처리로 연간 ‘E3’ 특별비자 1만500개를 받고 있다. 

더욱이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나라가 마스가(MASGA)를 비롯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만큼 비자 확대를 받아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이 미국에 진출할 경우 기업문화에 따른 관습이 분명히 존재하고, 본사 역량·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완전 현지 인력으로 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한국 인원이 파견 근무를 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어 비자 문제는 대미 투자의 주요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규모 투자를 하는 만큼 우리 정부는 비자 문제 해결 약속을 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강 실장은 지난 7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유사 사례 방지를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및 관련 기업과 공 조하에 대미 프로젝트 관련 출장자의 비자 체계 점검·개선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외교부는 2012년부터 한국인 전문인력 대상 별도 비자(E-4)를 신설하는 ‘한국 동반자법’(PWKA) 입법을 위해 힘쓰고 있으나 법안은 여러 번 발의에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7월에도 영 김·시드니 캄라거-도브 하원의원 주도로 공동 발의된 이 법안은 미국 정부가 전문 교육과 기술을 보유한 한국 국적자에 연간 최대 1만5000개의 전문직 취업비자(E-4)를 발급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다만 트럼프 정부가 이민 정책에 워낙 강경 일변도라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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