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약세 쏠림 심화…해외투자·대미협상 변수가 상단 결정
“위기와 다른 고환율”…준비자산·국민연금 움직임이 관건

[서울와이어=김민수 기자] 원/달러 환율이 열흘 넘게 1460원대에 머무르며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3일 장중 1475원 안팎까지 치솟은 뒤 외환당국의 구두 개입과 시장점검 회의 소식에 한차례 1450원대로 내려왔지만,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타며 19일 기준 종가는 1469원50전으로 1470원선 재돌파를 눈앞에 둔 상태다.
올해 들어 지난 14일까지의 주간 거래 종가 기준 연평균 환율은 1415원28전으로 외환위기였던 1998년(1394원97전)을 이미 넘어섰다. 시장에서는 ‘연간 평균 1400원대’라는 초유의 고환율 국면이 현실화됐다는 평가와 함께 연말 1500원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반면 정부 개입에 대한 경계감, 대외 건전성 지표의 안정 등을 고려하면 1500원 돌파 전망은 과도한 우려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다만 고환율이 새로운 기준선(뉴노멀)으로 굳어지는 흐름 속에서 상단이 어디에서 형성될지가 새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원화 약세 밀어 올린 건 ‘해외로 나가는 돈’
최근 환율 급등의 배경으로는 미국발 강달러 압력과 엔화 약세, 내국인의 해외투자 확대가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서학개미’의 미국 주식 매수세가 꺾이지 않으면서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구조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전날 발표한 국제투자대조표에서 3분기 말 기준 내국인의 해외투자를 의미하는 대외금융자산은 2조7976억달러로, 전분기 말보다 1158억달러 증가하며 역대 최대를 경신했다. 이 가운데 거주자의 증권투자 잔액은 1조2140억달러로 3개월 전보다 890억달러 늘었고, 직접투자 잔액도 8135억달러로 이차전지 등을 중심으로 87억달러 증가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의 국내투자를 뜻하는 대외금융부채도 1조7414억달러로 900억달러 늘었지만, 자산 증가 속도가 더 빨라 순대외금융자산은 1조562억달러로 258억달러 확대됐다. 겉으로는 대외 건전성이 좋아진 셈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해외투자 증가가 달러 수요를 키우며 환율 상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임인혁 한국은행 국외투자통계팀장은 “3분기 대외금융자산은 해외 직접투자와 증권 투자가 모두 확대되고 미국 증시 호조, 준비자산 증가 등이 겹치며 늘었다”며 “최근 환율 상승에는 거주자의 미국 증시 투자 확대, 국내 증시에서의 외국인 매도 등 수급 불균형이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도 “최근 급격한 원/달러 환율 상승에는 거주자 해외투자에 따른 달러 수요 확대가 기여한 부분이 크다”며 “거주자 해외투자 유출 속도가 둔화돼야 환율이 뚜렷하게 하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외 채권 투자 증가도 같은 흐름에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3분기 대외채권은 1조1199억달러로 사상 처음 1조1000억달러를 돌파했고, 이는 전분기 대비 271억달러 증가한 규모다. 장기적으론 건전성 개선 요인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달러 수요를 자극해 환율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

◆정부 “달러 부족이 원인…대미투자특별법 11월 중 제출”
정부는 최근 환율 급등을 ‘국내에서 버는 달러보다 해외로 나가는 달러가 더 많은 구조’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진단하고 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상수지 흑자가 880억~900억달러가 되더라도 해외로 나가는 요인이 많아 달러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며 “수출입 업체나 물가 등을 고려해 환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수출 대기업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고, 앞으로도 기재부가 관심을 가지고 모니터링하겠다”며 “정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주요 외환 수급 주체들과 협의해 과도한 환율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1차적인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추가 대책에 대해선 “그 이외에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한·미 관세협상 이행을 위한 ‘대미투자특별법’도 환율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추진하는 대신, 양국이 연간 200억달러의 외환조달 상한액을 설정하는 내용의 합의문(조인트 팩트 시트)을 공개했다. 관세율 15% 적용 시점은 법안 제출 달의 1일로 소급되는 만큼, 정부는 특별법을 “11월은 절대 넘길 수 없다”며 이달 중 국회에 제출한다는 입장이다.
구 부총리는 “미국에서 사업이 선정되면 돈을 조달해 담을 주머니가 필요하고, 그 주머니는 기금 형태가 맞지 않을까 싶다”며 “관리 주체는 정부 내부와 국회 논의를 통해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외환보유액을 직접 활용할지, 별도 기금을 신설할지, 국채 발행을 병행할지 등 재원 조달 방식에 따라 환율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질 전망이다.
국고채 금리 상승에 대해서는 “세계국채지수(WGBI) 가입이 되면 국고채 시장에 외국 자금 유입이 예상된다”며 “해외 자금이 한국 국고채 시장에 들어올 수 있다면 더 안정화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년에도 1400원대 상단 고착?…1500원 전망까지
증권가에서는 환율이 내년에도 1400원대 상단에서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DS투자증권은 내년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원/달러 환율 평균값으로 1406원을 제시하며 “저성장, 재정지출 확대, 잠재성장률 하락과 같은 구조적인 요인에 해외 자산 투자 확대 기조까지 겹치면서 원화 수급 불균형이 계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1500원 돌파 가능성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의 경제 구조 개혁 없이는 장기적으로 원화값 하락을 막지 못할 것”이라며 “원화값이 1500원대까지 급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올해 연간 평균 환율이 이미 1400원대를 넘어선 만큼 고환율 국면 자체는 피하기 어렵다는 공감대도 커지고 있다. 한·미 금리 역전 장기화로 인한 달러 수요 확대, 엔화 약세와 대미 직접투자 확대, 국내 성장률 둔화와 재정 부담 등 구조적인 요인이 겹쳐서다.
이정훈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하반기 원화 가치 하락 폭은 주요 통화 가운데 일본 엔화와 함께 최하위권에 속한다”며 “달러인덱스 수준은 2022년 초와 비슷한데 같은 기간 달러·원 환율은 200원 가까이 올라 원화의 체력 저하가 더 뚜렷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통화량 증가와 해외투자 확대 등 구조적인 요인이 원화 약세를 키워온 만큼 내년에도 환율 하단은 1370~1380원 수준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다만 전문가들은 최근 1460~1470원대 환율 수준을 ‘위기 징후’로 보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당국 개입과 대미 관세 합의 공개 이후 급등세가 한 차례 진정된 데다, 대외 건전성 지표도 과거 위기 국면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1460원대 중반까지 올라 1500원 돌파 우려가 제기됐지만, 현시점에서 그 가능성을 높게 보긴 어렵다”며 “구두 개입과 한·미 관세협상 팩트 시트 공개 이후 급등 압력이 진정됐고, 연말로 갈수록 대외 변수의 영향력도 약해지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장 관심은 대미투자특별법이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조달하느냐에 쏠릴 것”이라며 “외환보유액을 활용하면 준비자산 감소가 환율의 펀더멘털 상향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어 조달 방식이 명확해지기 전까지 변동성이 완전히 해소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위기 때와는 다르다…상단은 ‘대미투자+해외투자’가 결정”
신용 위험 측면에서는 이번 고환율이 과거 위기 때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형민 하나증권 연구원은 “현재 환율 레벨만 보면 위기 국면과 유사하지만, 한국 5년물 CDS 프리미엄은 20bp 초반으로 2022년 통화긴축기(74bp)나 작년 말 정치 불확실성 확대 국면(40bp), 상호관세 발표 직후(47bp)에 비해 현저히 낮다”며 “KP 달러채 스프레드도 연중 저점을 유지하고 있어 ‘환율 급등=한국물 펀더멘털 훼손’이라는 공식은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대외채권·채무 통계도 같은 메시지를 준다. 3분기 말 기준 우리나라 대외채무는 7381억달러로 2분기 말보다 25억달러 증가하는 데 그쳤고, 이 가운데 단기외채(만기 1년 이하)는 1616억달러로 54억달러 줄었다. 총 외채 중 단기외채 비율은 21.9%로 2분기(22.7%)보다 낮아졌고, 단기외채/외환보유액 비율도 40.7%에서 38.3%로 떨어졌다. 국내 은행의 외화유동성 커버리지 비율(LCR)은 160.4%로 규제비율 80%를 크게 웃돌았다.
대외 채무 구조가 장기 위주로 개선된 데다, 순대외채권이 3818억달러로 2분기 말보다 246억달러 늘어나는 등 외화 지급 능력은 오히려 강화됐다는 의미다.
다만 환율 상단을 제약할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미투자특별법이 통과되면 연간 최대 200억달러 규모의 외환 유출이 구조적으로 발생하게 되고, 이는 준비자산 감소를 통해 환율의 ‘펀더멘털 상향’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인증권에 따르면 2010년 이후 한국은행의 연간 준비자산이 100억달러 변동할 때 달러·원 환율은 평균 47원 움직였다.
최예찬 상상인증권 연구원은 “연간 200억달러가 실제로 유출될 경우 단순 회귀 추정만으로도 약 100원 전후의 환율 상승 요인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조달 방식에 따라 단기 충격은 제한적일 수 있지만 준비자산 감소가 누적되면 환율의 펀더멘털 상향 압력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의 ‘환율 소방수’ 역할도 변수다. 국민연금은 전략적 환헤지 10%, 전술적 환헤지 5%를 통해 외화자산의 최대 15%까지 환헤지에 나설 수 있다. 지난 8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액은 771조3000억원으로, 이론상 최대 115조원가량까지 환헤지가 가능하다.
시장에선 1480원선에서 국민연금의 대규모 환헤지, 선물환 매도나 한은과의 외환 스와프 등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도 제기된다. 다만 미국 재무부가 연기금을 통한 환 개입을 공개적으로 경계하고 있어 실제 행동 반경은 제한적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