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고착에 산업 비용 구조 충격
수입 의존 경제서 커지는 원가 리스크
해외투자 확대·중소기업 '취약성' 부각

사진=서울와이어 DB
사진=서울와이어 DB

[서울와이어=최찬우 기자] 원/달러 환율이 외환위기 수준을 넘어 장기간 고착되면서 한국 산업계 전반에 비상등이 켜졌다.

일시 변동이 아닌 ‘고환율 뉴노멀’로 굳어지는 조짐이 나타나며 기업들은 내년도 경영계획부터 투자 전략, 원가 구조까지 전면 재정비에 나선 상황이다.

◆고환율 공포에… 비용 구조 전반 충격

20일 서울외환시장에 따르면 올해 들어 원/달러 평균 환율은 1415원을 넘어섰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1394원)은 물론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이어진 2009년(1276원)보다 높은 수준이다. 경상수지가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대외 신인도도 높음에도 환율이 1400원대에 고착된 것은 이례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고환율의 충격은 산업별로 양상이 다르지만 대부분의 업종에서 ‘원가 부담 급증’이라는 동일한 압력이 나타난다. 

한국은 원자재·중간재의 80% 이상을 달러로 수입한다. 올해 석탄·원유·천연가스·광산품 등 주요 원재료의 수입물가지수는 165.17로, 2020년 대비 80% 이상 상승했다. 

중간재 역시 40% 가까이 올랐다. 제조업 특성상 조달·가공·판매가 빠르게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환율의 급등은 기업 실적에 즉시 반영된다.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경기도 평택항에 철강 제품이 쌓여 있다. 사진=연합뉴스

◆흔들리는 제조업, '정유·철강·식품' 압박

정유·석유화학 업계는 가장 빠르게 타격을 받고 있다. 원유와 나프타 등 핵심 원료를 100% 달러로 들여오는 산업 구조상 환율 상승이 곧바로 원가 인상과 환차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정유사들은 원유 결제 시점의 환율 변동을 피하기 어렵고, 중국 공급 과잉과 글로벌 수요 둔화로 제품가 인상도 쉽지 않다. 

업계 안팎에서는 내년 경영계획의 환율 가정치를 여러 차례 조정할 정도로 불확실성이 커졌고 환율이 10원만 움직여도 손익 규모가 크게 바뀌는 만큼 대응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철강업계도 이중고에 빠졌다. 철광석·유연탄 등 주요 원료의 수입 비용이 높아진 데다 미국의 50% 부품관세 부과까지 겹치면서 부담이 배가됐다. 글로벌 경기 둔화로 철강 수요가 줄고 가격 전가가 어려운 상황이라 원가 상승이 고스란히 실적 압박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일부 대형사는 수출 외화로 원료를 구매하는 방식의 자연적 헤지로 손실을 줄이고 있지만 환율 변동 폭이 커지면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식품업계에도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밀·옥수수·대두·원당 등 대부분의 식품 원재료가 해외 시장에 의존하는 만큼 강달러가 원가 상승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커피 원두, 식용유 등 주요 품목의 국제 시세까지 높아져 수입 단가가 급등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올해 벌어진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가격을 이미 올린 기업이 많아 추가 인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식품업계에서는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은 환차익으로 일부 부담이 상쇄되지만 내수 중심 기업은 비용 절감 외에는 뚜렷한 대응책을 찾기 어렵다는 평가다.

인천공항에서 시민들이 수속을 밟고 있다. 사진=인천국제공항공사
인천공항에서 시민들이 수속을 밟고 있다. 사진=인천국제공항공사

◆면세·항공·패션까지, '내수·서비스업' 충격

면세점과 항공업계는 고환율 영향이 소비 심리와 직결되면서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면세점의 경우 달러 기준 가격이 비싸지면서 일부 상품은 백화점보다 비싸지는 가격 역전 현상까지 나타났다. 

면세 쇼핑 중심의 단체 관광이 줄고 체험·개별 관광이 늘면서 객단가가 크게 낮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주요 면세점이 희망퇴직과 사업권 반납 등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도 이런 시장 변화를 반영한다.

항공업계는 유류비·리스료·정비비가 모두 달러로 결제되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고환율이 외화부채 부담까지 키우며 복합적인 압박이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여행 심리가 위축되면 수요가 둔화하는 ‘2차 충격’도 발생한다. 항공사들은 통화·이자율 스와프 등 헤지 비중을 늘리고 있으나 급격한 변동성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패션·화장품 업계 역시 복합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캐시미어·울·계면활성제 등 주요 원료를 수입하는 브랜드들은 비용 상승을 체감하는 반면 수출 중심의 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들은 환차익 효과가 일부 발생한다. 다만 물류비·원자재비가 모두 달러에 연동되는 구조여서 긍정적 효과는 제한적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클린룸. 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반도체 클린룸. 사진=삼성전자

◆해외투자·중소기업도 압박, '구조적 대응' 필요

해외투자 기업의 부담도 갈수록 커진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미국의 자국우선주의 정책이 강화되면서 반도체·배터리·전선·식품 등 주요 기업들이 최소 20곳 이상에서 미국 신규·증설 투자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고환율은 투자비를 크게 끌어올리고 있다.

중소 제조기업은 더욱 취약하다. 헤지 수단이 거의 없고 원자재 수입 비중은 대기업보다 높아 환차손 비중이 영업이익의 25%에 이른다는 조사도 있다. 정부는 경영자금 지원과 교육 확대에 나섰지만 환율이 구조적 요인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 단기 처방의 한계가 크다는 평가다.

고환율이 장기화하면서 산업 전반의 비용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 기업들은 환율 자체를 예측하는 데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비용 구조 재편’과 ‘투자 전략 재구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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