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억원 긴급 투입, 자금난 숨통 틔여
원료 공급 계약 조건 두고 1년째 평행선
업계 “장기 불황 속 구조 재편 서둘러야”

[서울와이어=최찬우 기자] 석유화학 합작사 여천NCC가 채무상환 불이행(디폴트) 직전 주주사 간 합의로 자금 지원을 확보하며 당장의 부도 위기를 피했다. 다만 업계에서는 구조적 불황과 공급 과잉으로 인한 경영난이 지속되는 한 비슷한 위기가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주주 한화·DL, 자금 지원 합의… 방식 놓고 온도차
12일 석화업계에 따르면 여천NCC의 지분을 50%씩 보유한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은 각각 1500억원 규모의 추가 자금을 증자 또는 대여 형식으로 지원키로 합의했다.
양사는 지난 3월 각각 1000억원을 출자했지만 이달 말까지 약 3100억원이 추가로 필요했고, 오는 21일까지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채무불이행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업계의 긴장감이 확산됐다.
한화솔루션은 지난달 1500억원 대여안을 이사회에서 의결하며 적극적 지원 의사를 보였다. 반면 DL케미칼은 “정밀 경영 진단과 자구책 마련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으나 대주주로서 책임과 협력사 피해 우려 등을 고려해 입장을 선회했다.
한화는 입장문을 통해 “DL케미칼이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정했지만 공시상 자금 용도가 ‘운영자금’으로 명시돼 여천NCC에 대한 실제 지원 의사를 확인하기 어렵다”며 “여천NCC에 자금을 투입하려면 DL케미칼의 자금 지원 이사회와 합작법인 이사회의 주주사 차입 결의를 거쳐야 하지만 아직 이러한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고 DL과의 협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현재 양사의 자금 지원 합의는 이뤄졌지만 지원 방식과 원료 공급 계약 조건을 놓고 여전히 견해차를 보인다.

◆사업 구조 차이와 공급 계약 갈등
한화솔루션이 적극적으로 여천NCC 지원에 나선 배경은 사업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지난해 기준 한화솔루션 매출의 43%는 기초·가공소재 등 석유화학 부문에서 나왔다. 이 원료 상당 부분이 여천NCC에서 공급된다.
기초소재인 LDPE, PVC뿐 아니라 자동차 부품·태양광 소재 등 고부가 제품 생산에도 여천NCC 원료가 필수다. 태양광 모듈에도 에틸렌 기반 소재가 사용돼 신재생에너지 사업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DL케미칼 역시 다운스트림(기초소재) 제품을 생산하지만 상대적으로 원료 공급자 성격이 강하고 해외 합작법인(JV) 등을 통해 일부 원료를 자체 조달할 수 있다. 주력 제품도 범용 플라스틱보다는 특수 폴리머 비중이 높아 에틸렌 의존도가 한화솔루션보다 낮다.
양사는 원료 공급 계약 조건을 놓고 1년 가까이 협상을 이어왔다. 한화는 “시장 원칙에 따라 공정한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며 “불공정 거래로 부당이익을 취하거나 과세 처분·법 위반 사유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시가 기반 거래 원칙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자금 지원을 먼저 집행한 뒤 공급 계약은 당사자 간 협상을 통해 공정하게 체결하겠다는 방침이다.
반면 DL은 한화가 여천NCC와의 계약에서 ‘더 싼 가격’만 고집해 회사 부담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DL에 따르면 공급 가격 하방 설정과 20년 장기계약을 제안했지만 한화가 거절했고 올 초부터는 여천NCC 외 다른 석유화학사와 접촉해 에틸렌 구매를 추진했다고 지적했다.
DL은 “가격 하한을 없애자는 한화의 입장 고수로 가격 협상이 고착상태”라며 “충분한 경영상황 검토 없이 증자를 수용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구조적 불황 지속… 재발 가능성 우려
이처럼 주주사 간 입장 차이가 표면화된 가운데 여천NCC가 속한 국내 석유화학 업계 전반도 장기 불황과 공급 과잉에 직면했다. 여수·대산·울산 등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의 다수 NCC가 경영난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은 일부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했고 LG화학은 여수 NCC 2공장 매각을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중국은 에틸렌 생산량을 한국의 5배 규모인 5200만t까지 확대했고 중동도시장 경쟁에 합류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3년간 1500만t 규모의 신규 설비가 전 세계에서 가동되며 이 상황이 지속되면 국내 석유화학 기업 절반만 생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부는 지난해 말 ‘석유화학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으나 후속 지원책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만약 여천NCC가 청산됐다면 양사 지분 가치는 사실상 ‘0’에 수렴했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지난해 말 기준 순자산 7196억원이지만 부채를 감안하면 주주 몫은 거의 남지 않는다. 회계 장부에 기록된 가치로 매각하더라도 양사는 회계상 3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떠안는다.
금융시장 불안도 커진다. 여천NCC의 시장성 차입금은 6950억원에 달하며 이달에만 1835억원의 만기가 돌아온다. 신용등급이 한 단계만 하락해도 일부 회사채에 ‘크로스 디폴트’가 발동해 조기상환 압박이 가중된다. 여천NCC가 카드매출채권을 유동화해 1400억원을 조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2의 홈플러스 사태’ 우려도 제기됐다.
업계 관계자는 “대주주 지원으로 당장은 위기를 넘겼지만 근본적 체질 개선 없이는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라며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 구조 재편 방안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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