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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와이어=김민수 기자] 미국이 한국에 3500억달러(약 485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요구하면서 한·미 통화스왑이 외환시장 안전벨트로 다시 부각됐다.

정부는 “상식적 수준의 외환시장 안전장치”라며 무제한 한·미 통화스왑 개설 필요성을 미국에 제시했지만, 비(非)기축통화국과의 상설·무제한 스왑에 부정적인 미국 기류를 감안하면 성사 가능성은 지금으로서는 높지 않다.

◆통화스왑, 한마디로 ‘국가 간 외화 마이너스 통장’

통화스왑은 두 나라 중앙은행이 ‘급할 때 서로 돈을 빌려 쓰자’고 미리 약정하는 계약이다. 한국은행이 원화를 맡기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로부터 달러를, 반대로 상대국이 필요하면 원화를 빌려갈 수 있다. 보통은 한도와 기간을 정한 ‘유한형’이고, 미국은 일본·유로존·영국·캐나다·스위스 등 기축통화권과만 한도·기간을 두지 않는 ‘상설 무제한’ 스왑을 운영한다.

한국은 2008년 금융위기 때 300억달러, 2020년 팬데믹 때 600억달러 규모의 한·미 스왑을 통해 급한 불을 껐다. 2021년 말 만기 종료 이후 현재는 상설 무제한 라인에 포함돼 있지 않다. 다만 캐나다·스위스·중국·호주·UAE·튀르키예·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에 더해 2023년에는 일본과도 3년짜리 스왑을 추가했다. 일본과의 스왑은 원화를 달러로 바꿔 교환하는 방식이라 한국 입장에선 실수요에 더 가까운 장치로 평가된다.

핵심은 ‘시장 밖 달러 조달’ 효과다. 스왑이 열려 있으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쓸어 담지 않고도 한국은행이 직접 달러를 들여올 수 있어 환율 급등을 막는 데 유리하다. 실제로 2008년과 2020년에는 ‘스왑 체결’ 뉴스만으로도 급등하던 환율이 진정되는 심리 안정 효과가 확인됐다.

정부는 스왑 제안 배경을 외환시장 안전장치를 확보하기 위한 상식적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대규모 대미 투자 이행 과정에서 환율 충격을 줄이려면 ‘시장 밖 달러 라인’을 확보할 이유는 분명하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사진=GPT생성
정부는 스왑 제안 배경을 외환시장 안전장치를 확보하기 위한 상식적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대규모 대미 투자 이행 과정에서 환율 충격을 줄이려면 ‘시장 밖 달러 라인’을 확보할 이유는 분명하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사진=GPT생성

◆왜 하필 지금?…관세협상 뒤집기와 ‘현금 직접출자’ 압박

불씨는 한·미 관세협상에서 피었다. 7월 말 관세 타결 당시 한국은 3500억달러(우리 외환보유액 4163억달러의 80%를 넘는 규모) 투자 펀드 조성에 합의했다. 애초에는 대출보증·채권 등 간접 금융수단을 섞는 그림이었지만, 최근 미국이 “현금 직접출자 비중을 크게 늘려라”고 요구했다는 게 정부와 금융권의 공통된 설명이다.

정부는 스왑 제안 배경을 두고 “외환시장 안전장치를 확보하기 위한 상식적 대응”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단기간에 대규모 달러를 시장에서 조달할 때 벌어질 일이다. 달러 수요가 급증하면 원화 가치는 급락(환율 급등)하고 수입물가와 금융비용이 잇따라 뛴다. 금융시장 일각에서는 “스왑 없이 미국 요구대로 달러를 마련하면 원화값이 몇백원이 아니라 1000원까지도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다만 미국 입장에선 한국 같은 비기축통화국과 상설·무제한 스왑을 맺을 유인이 크지 않다. 정치·안보를 포함한 포괄 협력의 테이블에서 ‘카드’로 다룰 가능성이 높다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대규모 대미 투자 이행 과정에서 환율 충격을 줄이려면 ‘시장 밖 달러 라인’을 확보할 이유는 분명하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통화스왑 이미지. 사진=GPT생성
통화스왑 이미지. 사진=GPT생성

◆효과는 크지만 한계와 ‘숨은 리스크’도…터키 사례가 남긴 경고

스왑의 장점은 명확하다. 필요할 때 즉시 달러를 조달하고 환율 급등을 완화해 금융시장 불안을 진정시킨다. 수입물가와 해외지출 부담을 덜어주는 파급효과도 크다. 특히 ‘무제한’이면 충격 흡수력은 더 강해진다. 반대로 스왑이 없으면 달러를 시장에서 직접 사야 하므로 원화 약세와 물가 상승, 기업·가계의 금융비용 증가로 번질 위험이 커진다.

하지만 스왑은 만능키가 아니다. 환율 변동에 따른 손익이 발생할 수 있는 ‘환차’ 리스크가 있고, 만기 연장(롤오버)이 막히면 상환 부담이 한꺼번에 커지는 ‘연장 리스크’가 따른다. 더불어 상설·무제한 라인의 미국 중심성 때문에 외교·정치 변수에 노출되는 ‘비대칭 리스크’도 상존한다.

튀르키예 사례는 리스크의 실체를 보여준다. 한국은 2021년 8월 튀르키예와 3년짜리 스왑을 체결(2조3000억원↔175억리라)했는데, 이후 리라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담보가치가 크게 줄었다. 만기(2024년 8월)를 앞두고 상환 부담이 커지자 한국은 스왑을 3년 연장하며 리라 담보를 560억리라로 늘렸다. 스왑은 외화 유동성 배관을 놓는 장치지만, 교환 통화의 가치가 급변하면 서로의 리스크 관리가 정교해져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진은 미국 현지에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4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은 미국 현지에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4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관건은 ‘형태·페이스·세이프티넷’…결국 ‘신뢰’가 열쇠

관건은 스왑의 형태다. 상설·무제한이 최선이지만 현실성이 낮다면, 유한형이라도 규모를 충분히 키우고 신속한 만기 연장 약속을 확보하는 게 합리적이다. 시장은 ‘얼마를,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지와 함께 연장 가능성을 가장 민감하게 본다.

여기에 3500억달러 투자 집행의 페이스가 환율 경로를 좌우한다. 현금 직접출자 비중을 얼마나 낮추고 보증·대출 등 간접 금융수단을 어느 정도 섞을지, 집행을 어떻게 분할할지의 설계가 핵심이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달러 수요가 단기에 집중돼 원화 약세 압력이 커지는 만큼, 분기별 로드맵과 조달·집행 매칭 계획을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아울러 스왑 외 세이프티넷을 넓히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외환보유액 내 현금성 자산 비중을 높이고, 수입선 다변화와 기업의 환헤지 유인을 강화해 충격 흡수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정부가 말하는 “상식적 안전장치”의 목표 수치와 이행 로드맵을 함께 공개해야 시장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통화스왑은 위기 때 꺼내 쓰는 ‘달러 비상금 통장’이다. 대규모 대미 투자라는 큰 파도를 앞두고 안전벨트를 다시 조여 매자는 요구는 합리적이다. 다만 상설·무제한 스왑은 미국의 정치·안보 레이더에 걸린 고난도 카드다. 결국 관건은 외환 충격을 최소화하는 설계력과 시장과의 신뢰다. 무엇을, 어느 속도로, 어떤 장치로 뒷받침할지—정부의 숫자와 로드맵이 필요한 시점이다. 스왑이 ‘달러 조달’의 기술이라면, 그 효과를 현실로 만드는 일은 우리의 정책 선택과 협상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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