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윤 기자.
천성윤 기자.

[서울와이어=천성윤 기자] 지난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경주 행사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우리 산업계가 얻은 수확은 상당하다.

먼저 한미 정부가 관세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해 불확실성을 해소했다. 우리 협상단은 2000억달러의 현금 투자를 연간 200억달러 한도로 분할 투자하는 안을 관철해 미국의 강도 높은 압박에 맞서 타결에 성공했다.

이는 5500억달러의 순수 현금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끝나는 2029년 1월까지 납부해야 하는 일본에 비하면 선방했다는 평가다. 물론 우리 정부의 타결 내용 또한 장기적으로 재정에 큰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일단 대미 수출에 악영향을 주는 관세가 곧 낮아지게 돼 산업계는 한숨을 놨다. 

그런데 이 관세 타결 이슈마저 덮어버린 초대형 이벤트가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바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벌이고 간 ‘인공지능(AI) 축제’다. 

황 CEO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을 친구처럼 불러내 시민들에 둘러 쌓여 치맥을 함께 해 전 국민적 관심을 모으더니, 다음날 데이터센터용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한국에 우선 공급한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고 갔다. 대규모 GPU 수급을 국정 과제로 삼았던 이재명 정부는 황 CEO의 결단 덕에 단숨에 ‘AI 세계 3강’을 꿈꿀 수 있게 됐다.

또 황 CEO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그룹, LG전자, 네이버 등 유수 기업과 AI 협력을 발표했다. 그는 과거 PC방 돌풍으로 엔비디아 기사회생에 도움을 준 한국에 진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다. 단 이틀간 행보만 봐도 그는 APEC 참석차 의례적으로 한국에 온 것이 아닌, 진정성을 갖고 진짜로 한국과 협력을 다지러 온 것이 확실하다. 

황 CEO와 엔비디아가 대규모 AI 선물 꾸러미를 놓고 갔지만, 이제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활용해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는 준비가 됐는지 고민해 볼 차례다. 

우려스러운 것은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 규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량의 GPU를 투입할 데이터센터 관련 규제다.

미국은 데이터센터 건립을 위해 행정 간소화를 실시해 무려 18개월의 단축 효과를 보고 있다. 일본도 관련 규제를 완화해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아마존이 데이터센터를 투자하기로 했다. 대만도 정부가 적극 밀어줘 애플, 구글, 아마존 데이터센터를 기세 좋게 유치했다. 

하지만 한국은 전력 및 환경규제가 유독 심해 빅테크들의 데이터센터 기피국이 된지 오래다. 산업부는 수도권 에너지 소비 집중을 막기 위해 규제가 필요하다면서도, 부작용을 인정하고 개선 방안을 내놓는다고 했다. 

또 내년 1월22일 시행 예정인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도 규제로 인한 업계 위축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된다. 

대표적으로 이 법에서는 ‘고영향 AI’라는 생경하고 모호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지정된 경우 투명성 확보, 위험관리체계 구축, 사용자 고지 등 각종 의무가 부과된다. 지침을 어길 시 과태료 등 처분이 따른다.

이런 모호성은 기업 입장에서 비용도 비용이지만 ‘내 서비스가 규제 대상이 될까’하는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규제 기준을 맞춰야 하는 압박에 사업 추진을 주저하게 만든다. 여기에 규제 대상으로 지정될 우려로 인해 리스크가 높은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AI 기술 개발을 주저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에서 강력한 산업규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반도체·조선·자동차 등 경제를 견인하는 핵심 산업은 예외 없이 정부의 규제 완화 덕분에 성장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도 반도체 산업 진출 당시 정부가 전자산업 수입 규제를 완화 해줘서 성장이 가능했다. 

1990년대 정보기술(IT) 벤처기업들도 벤처기업특별법(1997), 정보통신진흥법(1999)를 통해 실리콘밸리식 자율과 실험을 허용한 점이 강력한 성장 모멘텀이 됐다. 바이오·배터리도 정부가 규제 완화와 예외를 인정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지난 십수년간 산업화 성장에서 발생한 부작용에 너무 집중해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사전허가제 중심 규제가 남발하고 있다. 스타트업과 대기업 모두 ‘먼저 시도하면 불법’이라는 인식이 가득하다. 안전을 지나치게 우선시하는 행정문화도 지적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재명 대통령이 AI에 상당한 의지를 갖고 있어 업계의 민원에 귀 기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지난 9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은 ‘기업성장포럼 출범식’에서 작심한 듯 정부의 계단식 규제 343건을 빼곡하게 적은 대형 패널을 들고나와 기업 규제가 성장을 얼마나 가로막는지 강조했다. 그는 “대한민국 성장의 정체를 가져오는 근본적인 이유”라고 진단했다. 신사업 아이디어가 별천지처럼 쏟아지고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AI 시대에 한국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키워드
#기자수첩
저작권자 © 서울와이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