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샘 올트먼 만나 직접 금산분리 언급
대통령실·경제부처·야당, 본격 개정안 논의 시작
공정위, 산업계 요구 민원 일축… 시민단체도 반대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지난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와이어=천성윤 기자] 천문학적 인공지능(AI) 인프라 투자가 필요해진 산업계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완화를 건의함에 따라 대통령실과 경제부처가 검토 중인 가운데,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주 위원장은 “주요 기업이 규제 탓만 하고 투자는 안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시민단체도 특정 기업만 혜택을 본다고 주장함에 따라 규제 완화에 사회적 진통이 예상된다. 

◆이 대통령, AI 대규모 투자 예상… 직접 ‘금산분리’ 언급

지난 21일 주 위원장은 정부세종청사에서 취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금산분리 완화에 관해 “최후의 수단”이라며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사실상 제동을 걸었다.

금산분리란 산업자본이 금융회사를 사금고화하거나 산업 부실이 금융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제다. 1982년 은행법 개정 과정에서 본격 도입됐으며 대기업 일반지주회사가 국내 금융·보험사의 주식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거래법 규정이 대표적이다. 공정위가 주무부처다.

주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이재명 대통령의 의중과도 궤를 달리해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금산분리 완화의 물꼬를 튼 것이 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를 만난 자리에서 직접 “독점 폐해가 없다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범위 내에서 금산분리 등 규제 완화 방안을 검토하라”고 동석한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이는 오픈AI·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초대형 AI 인프라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에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공급하는 파트너십 투자 의향서(LOI)를 체결한 직후 나온 발언이다. 

스타게이트 참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만큼, 산업과 금융이 적절히 융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에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과거에 안 한다고 한 게 반드시 ‘선(善)’은 아니다”며 “금산분리의 근본적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전 세계 주요국은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산업과 금융의 결합이 강해지는 추세다. 수십~수백조원이 투입되는 AI 관련 투자를 기업 홀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세계적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함께 1000억달러(약 147조원) 펀드를 조성해 AI 투자를 진행한다. 알파벳(구글)과 아마존 등 빅테크도 연이어 사모펀드와 합심해 자본을 조달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미국 빅테크들이 AI 인프라에만 2028년까지 3조달러(약 4414조원)을 집행할 것으로 예상했다. 

평소 정치 활동에서 기업 규제를 비교적 강조해 온 이 대통령이 직접 금산분리를 언급한 배경에도 세계 질서가 AI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긴박한 변화가 있다는 분석이다. 

◆규제 완화 본격 논의… 산업계-공정위·시민단체 온도차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21일 일본 도쿄대학교 야스다 강당에서 열린 '도쿄포럼 2025'에서 개회사를 하고 있다. 사진=SK수펙스추구협의회

한국 산업계는 ‘규제 철폐’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 회장은 지난 19일 “대규모 투자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그동안에 있었던 규제들을 좀 개선해야 한다”며 “펀드를 구성하고 외부의 자금을 조달해서 투자하는 방식으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금산분리 논란이 일자 최 회장은 “금산분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며 “투자를 감당할 새로운 제도를 마련해달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현행법은 지주회사가 금융사를 보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기업이 금융사와 합작법인을 만들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같은 산업계 요구에 주 위원장은 ‘민원’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수십년된 규제를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바꿀 수는 없다”며 “규제와 관련한 논의가 다양한 시각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너무 한쪽 측면에서 일종의 민원성 논의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아 상당히 불만”이라고 강조했다. 몇 개 대기업의 금융 지배 부작용을 강하게 우려한 것이다. 

그는 ‘금산분리 완화가 최후의 카드나 수단이라는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며 “다른 대안이 있으면 그 대안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데, 정 다른 방법이 없다면 금산분리 완화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제력 집중이나 독과점 폐해는 아직도 한국 경제에서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다”며 “금융기관을 통한 산업 부문의 지배력 확장 문제, 경제력 집중의 문제가 상존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또 “한국 경제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기업들이 본업에 충실해 연구개발(R&D) 혁신을 계속하는 것으로, 그동안 전략산업 분야에서 잘나가는 기업은 이런 투자를 잘 해왔다”며 “주요 기업이 규제 탓만 하고 투자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주회사의 손자회사가 첨단전략산업에 투자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이 대통령과 발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시민사회 일각에서는 금산분리 완화가 특정 기업의 혜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현재 국내 산업계에서 AI 관련 설비투자를 가장 크게 늘릴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들을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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