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의료 사유 등 시간끌기 주효…기한 연장·전자발찌 완화
법정 맞대결 본격화…“정치적 기소” vs “국제적 의무”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으로 17년 간 끌어온 론스타 펀드 사태가 사실상 막대한 혈세 유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윤석열 정부가 야심차게 소송과 주범인 스티븐 리(한국명: 이정환) 송환을 추진했지만, 이를 미국 법원이 막으면서다. 이 같은 상태에서 정권은 바뀌었고, 수천억대에 달하는 배상금은 새 정부에 떠넘겨졌다. 키맨 체포와 이후 미국 법정에서 나온 정부의 논리와 실책을 면밀히 분석해본다. [편집자주]

(사진=연합뉴스)

[서울와이어=황대영·천성윤·정윤식·박동인 기자] 외환은행 매각 비리 혐의로 한국 정부의 송환 대상에 오른 스티븐 리(한국명: 이정환) 사건에 대한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재판 시작과 동시에 스티븐 리 측은 송환 요건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했고, 검찰은 국제 조약상의 의무와 도주 전력을 앞세우면서 재판은 치열한 공방전으로 치닫게 됐다.

◆ 송환 공방의 서막

2023년 7월 13일, 미국 뉴저지주(州) 연방지방법원은 스티븐 리 사건의 송환 심리 개시 일정을 공식 공지했다. 3월 보석 국면에서 일시적으로 풀려났던 스티븐 리가 다시 법정에 서야 하는 시점이 정해진 것이다. 보석 이후 조건부 외출이 잇따르며 한국 정부의 ‘신병 철저 관리’ 구상이 흔들린 상황에서 이번 공지는 송환 여부를 가를 본격적인 재판 절차가 시작됐음을 알린 신호였다.

같은 해 7월 31일 미 연방검찰은 스티븐 리를 한국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범죄인 인도 송환서(Government’s Memorandum of Law in Support of Extradition)’를 법원에 제출했다. 검찰은 스티븐 리의 행위가 범죄인 인도조약 요건에 충족되기 때문에 한국 사법당국에 그를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환서에 따르면 먼저 검찰은 법적 근거부터 분명히 했다.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과 미국 연방법을 근거로, 인도 절차는 국제법적 의무일 뿐만 아니라 미국 국내법에도 정식으로 규정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외환은행 매각 비리와 관련해 스티븐 리가 기소된 혐의가 ‘쌍방가벌성(dual criminality)’ 요건을 충족한다는 점,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모두 범죄로 처벌될 수 있는 점 등을 앞세웠다.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검찰이 제출한 ‘범죄인 인도 송환서’ 일부. 빨간 밑줄 친 부부은 “미국은 한국과의 조약 의무에 따라 이 씨의 송환을 요청한다”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이어 허위 컨설팅 계약을 통한 거액의 횡령, 그 자금을 해외 계좌로 이전한 과정 등 스티븐 리의 구체적 범죄혐의 내용도 제출했다. 그중에서도 스티븐 리의 도주 전력을 강조했다. 검찰은 2006년 한국 검찰이 그에게 소환장을 발부했음에도 그가 이를 회피하고 미국으로 출국한 것은 ‘전형적인 도주 행위’라고 봤다.

아울러 스티븐 리가 막대한 재정적 자원과 해외 네트워크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는 점, 실제로 미국 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을 통해 생활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며 도주전력이 있는 스티븐 리를 보석 상태로 두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법원이 3월 보석을 허용하며 ‘조건부 자유’를 부여한 것은 송환 절차의 신뢰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범죄인 인도 절차의 성격 역시 강조했다. 일반 형사재판과 달리 외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인도 사건에서는 ‘도주 우려’가 단 1%라도 존재하면 구속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한국 정부가 요청한 인도 청구를 존중하고, 스티븐 리를 송환하기 위해 보석 조건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시간 끌기 전략에 무력…드러난 한국 정부의 ‘역량 부족’

스티븐 리 측은 송환 심리가 시작되자마자 연속적으로 기한 연장을 요청하며 시간 벌기 전략을 구사했다. 2023년 9월 11일, 스티븐 리의 변호인은 뉴저지 연방법원에 제출한 서신을 통해 ‘개인적 사정과 예정된 다른 재판 일정’을 이유로 정부 측 송환서에 대한 답변 제출 기한을 9월 29일까지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정부 측도 이에 동의하면서 법원은 기한 연장을 승인했다.

하지만 연장된 기한은 지켜지지 않았다. 스티븐 리 변호인 측은 9월 28일 다시 법원에 답변 기간 연장 요청서를 제출했다. 이번에는 ‘의료적 사유’를 들며 기존 마감일을 맞출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또다시 답변 제출 기한은 10월 10일로 미뤄졌고, 검찰의 반박 제출 기한도 10월 25일로 함께 연기됐다. 결과적으로 송환 심리 일정이 한 달 가까이 지연된 셈이다.

이러한 반복된 연기 요청에 대해 스티븐 리 측은 ‘방어권 보장’이라고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재판 절차의 속도를 늦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의료 사유를 강조한 것은 단순 변론 준비 부족을 넘어 전략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국제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일수록 피고인 측은 기한 연기를 통해 법원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여론의 피로감을 높이는 효과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이 제출한 기한 연장 요청서. 빨간 밑줄 부분은 “기한을 2주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이 제출한 기한 연장 요청서. 빨간 밑줄 부분은 “기한을 2주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또한 10월 들어서는 보석 조건 자체를 완화하는 조치도 뒤따랐다. 10월 11일 법원은 스티븐 리가 자택을 벗어나 의료 치료를 받을 경우 전자발찌(GPS 모니터링 장치)를 제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스티븐 리의 생활 제약을 상당히 완화하는 조치로 그의 ‘조건부 자유’가 한층 더 넓어진 것이다.

전자발찌 해제는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고려한 조치였지만, 송환 절차의 신뢰성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앞서 검찰이 “도주 전력이 있는 피고인을 보석 상태로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던 점을 감안하면 전자발찌 해제 결정은 사실상 검찰 논리를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가 됐다.

재판 연기와 답변 기한 연장, 전자발찌 해제는 스티븐 리 측의 ‘시간 끌기’ 전략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제어하지 못한 채 스티븐 리에게 주도권을 내줬다. 그간 한국 정부가 자신해 온 조기 송환 계획은 점점 공허해지기 시작했으며, 스티븐 리의 요구는 계속해서 관철되기 시작했다.

◆ 법정 맞대결 본격화…“韓 정부의 정치적 탄압” vs “국제적 의무”

스티븐 리 사건의 본질적 쟁점은 송환 여부를 둘러싼 법리 다툼이었다. 2023년 10월 16일 스티븐 리 측은 반박서를 통해 미국 검찰이 주장한 송환 요건을 전면 부정했다. 한국 검찰의 기소는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며, 이번 송환 청구 자체가 신뢰할 수 없다고 맞섰다.

스티븐 리 측이 가장 먼저 제기한 논리는 ‘쌍방가벌성’ 문제였다. 허위 컨설팅 계약과 자금 유용이 미국법상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송환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한국 검찰이 제출한 증거는 일방적 자료에 불과해 독립적 증거 능력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송환 절차가 형사재판이 아닌 단순 적격성 심사라는 점을 역이용해 “이 정도 증거로는 송환이 불가하다”는 논리를 세운 것이다.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이 제출한 반박서. 빨간 밑줄 친 부분은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 여론은 론스타를 향해 반감을 드러냈다. 론스타는 외국인 투자자의 상징이 됐고, 과도한 이익을 챙겨 국부를 유출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이 제출한 반박서. 빨간 밑줄 친 부분은 “한국의 정치권과 언론, 여론은 론스타를 향해 반감을 드러냈다. 론스타는 외국인 투자자의 상징이 됐고, 과도한 이익을 챙겨 국부를 유출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또한 공정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스티븐 리 측은 “한국 검찰이 제출한 증거 중 상당수가 배심원 제도 없는 환경에서 작성된 조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번 사건에 연루된 다른 인사들은 이미 한국에서 처벌을 받거나 기소되지 않았는데, 자신에게만 송환을 청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법무법인 세종 장우진 미국 변호사는 “정치적 동기와 인권 문제는 국제 형사송환 사건에서 충분히 제소 가능한 쟁점”이라며 “특히 한국의 배심원 제도 부재를 근거로 한 ‘공정재판’ 우려는 피의자의 인권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미국 법원이 이를 일정 부분 받아들일 여지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11월 8일 미국 검찰 역시 반박서(Reply)를 제출하며 정면 대응했다. 검찰은 반박서에서 “허위 계약과 횡령은 미국법상 사기·자금세탁으로 처벌 가능하므로 쌍방가벌성 요건은 충족된다”고 강조했다. 또 송환 심리의 목적은 유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해당 인물이 기소된 범죄가 ‘송환 대상 범죄’인지 여부만 판단하는 절차라고 짚었다. 한국 검찰 자료만으로도 송환 요건이 충족된다는 주장이다.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제출한 검찰의 재반박서. 빨간 밑줄 친 부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에 제출한 검찰의 재반박서. 빨간 밑줄 친 부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 자료=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또한 스티븐 리 측의 ‘정치적 기소’ 주장도 일축했다. 검찰은 “미국 법원은 외국 수사기관의 동기를 재단할 권한이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스티븐 리가 과거 한국 검찰의 소환을 피하고 미국으로 출국한 전력이 있다는 점을 재차 상기시키며 “송환 거부는 곧 도주의 위험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조약 제15조에 규정된 ‘전문성 원칙’(Rule of Specialty) 준수도 한국 정부가 외교 경로를 통해 보증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검찰은 피고인 측의 ‘정치적 기소’ 주장은 법원이 다룰 사안이 아니며 송환은 조약상 ‘국제적 의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12월 11일 스티븐 리 측은 검찰 측 주장에 대해 재반박서(Sur-reply)를 제출했다.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은 “미국 정부가 제시한 법조항은 사실관계와 맞지 않아 쌍방가벌성을 충족하지 못한다”며 “제출된 증거 역시 여전히 불충분하다. 한국 검찰의 기소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스티븐 리 측의 건강 문제도 부각했다. 2023년 10월 심장마비로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은 뒤 재활 중이라는 점을 들며 송환은 사실상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은 의사 진단서를 첨부해 전자발찌 착용조차 건강을 해치는 상황임을 강조하며 ‘인도적 고려’를 송환 불허 사유로 내세웠다.

<글 시점 요약 타임라인>

2023.7.13: 뉴저지 연방지방법원, 스티븐 리 사건 송환 심리 개시 일정 공식 공지.

2023.7.31: 미 연방검찰, ‘범죄인 인도 송환서’ 제출.

2023.9.11: 스티븐 리 측, 개인 사정·다른 재판 일정을 이유로 답변 기한 연장 요청.

2023.9.28: 변호인단, 의료 사유를 들어 재차 답변 기한 연기 요청.

2023.10.11: 법원, 의료 치료 시 전자발찌 제거 허용 결정.

2023.10.16: 스티븐 리 측, 송환 요건 전면 부정하는 반박서 제출.

2023.11.08: 미 검찰, 쌍방가벌성·송환 요건 충족을 강조하는 반박서 제출.

2023.12.11: 스티븐 리 측, 정치적 기소·건강 문제를 내세운 재반박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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