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와이어 정현호 기자] 미국의 도 넘은 요구에 국내 반도체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됐다. 현지 생산공장, 연구개발(R&D) 건립 등에 보조금을 지원해 줄 테니 시설 내부를 공개해 달라는 등 미 행정부 요구가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당초 기업들도 예상을 뛰어넘는 보조금 지원 조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 등 경기침체의 장기화로 반도체산업 전반에 한파가 닥친 가운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구체적으로 미 상무부는 자국의 경제 안보에 초점을 맞춰 미 보조금을 받는 기업에겐 중국 내 투자를 확대하거나 신규 투자를 제한하겠다고 예고했다. 이에 그간 한국 경제와 수출에 버팀목 역할을 해온 K-반도체가 큰 혼란을 겪고 있다.
현재 국내 반도체산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국회는 정쟁에만 몰두하는 등 반도체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상향하는 내용이 담긴 'K-칩스법'은 뒤로 제쳐놨다. 정부 역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 신청에 신중히 접근한다는 입장이다. 고금리와 경기침체 분위기 속 미국 내 공장 설립 등에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기업들에 보조금 신청은 선택이 아닌 필수 로여겨진다.
보조금 신청에 따라 반도체 최대 수출시장이자 글로벌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중국을 포기해야 할 수 있다는 점은 기업들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이다. 특히 반도체 장비의 상당 부분은 미국에 의존하는 실정으로 자칫 잘못된 판단은 거대한 두 시장을 포기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사이 기업들은 실적 부진에 빠졌으며, 반도체 혹한기는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같은 기간 반도체 패권을 둘러싸고 미국, 중국, 일본, 대만 등 주요 국가의 다툼이 본격화하는 등 국내 반도체기업은 이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 외 제3국의 생산공장 건립 등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한국을 반도체 ‘생산 허브’로 키우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 한국이 중심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에서 집중 육성하는 첨단산업이자 핵심기술인 반도체가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의 이권 다툼에 휩쓸리지 않을 방법이다. 양국이 벌이는 샅바싸움에서 실익을 챙기려면 압도적인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 확보도 필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지난해 8월 복권 이후 첫 방문지로 경기 용인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차세대 반도체 R&D 단지’ 기공식에 참가해 20조원 투자 방침을 공개할 정도로 기술력 강화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실제 TSMC의 파운드리공장이 대만의 방패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한국도 이를 모티브 삼아야 한다. 국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 높은 제품들을 생산해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궁극적으로 초격차를 통해 미중 패권전쟁에 대응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