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법원, 17년 만에 체포·임시구금…보석 심리서 공방 본격화
검찰 “도주 전력·해외 자산” vs 변호인 “미 시민권·가족정착”
법원, 예배·졸업식 등 외출 ‘조건부 자유’ 확대…송환 전략 불투명
외환은행 헐값 매각 논란으로 17년 간 끌어온 론스타 펀드 사태가 사실상 막대한 혈세 유출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윤석열 정부가 야심차게 소송과 주범인 스티븐 리(한국명: 이정환) 송환을 추진했지만, 이를 미국 법원이 막으면서다. 이 같은 상태에서 정권은 바뀌었고, 수천억대에 달하는 배상금은 새 정부에 떠넘겨졌다. 키맨 체포와 이후 미국 법정에서 나온 정부의 논리와 실책을 면밀히 분석해본다. [편집자주]

[서울와이어=황대영·천성윤·정윤식·박동인 기자] 외환은행 매각 비리 의혹으로 17년 만에 송환 절차가 본격화된 스티븐 리 사건은 예상과 달리 보석 국면에서부터 균열이 생겼다. 미국 법원이 ‘가택수감’을 조건으로 석방을 허용하면서 한국 정부가 강조해온 ‘철저한 신병 관리’ 전략은 그 출발선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 체포영장 발부…17년 만에 움직인 송환 시계
2023년 2월 24일 미국 뉴저지(州) 연방지방법원은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허위 컨설팅 계약을 이용해 거액의 자금을 빼돌린 혐의로 ‘스티븐 리(한국명: 이정환)’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제출한 범죄인 인도 요청 서류와 리의 신원·거주지 자료에 따라 내려진 조치로, 17년 넘게 이어진 송환 시도에서 처음으로 진전을 보인 순간이었다. 같은해 3월 2일 스티븐 리는 뉴저지 자택 인근에서 연방 보안관에 의해 체포됐고 법원은 그에 대한 임시 구금을 명령했다.
이후 열린 보석 심리에서 미국 연방검찰과 한국 정부는 한목소리로 스티븐 리에 대한 ‘보석 불허’를 주장했다. 핵심은 스티븐 리의 도주 전력이었다. 검찰은 2006년 한국 검찰이 소환을 통보했음에도 스티븐 리가 이를 회피한 채 출국한 사실을 지적했다. 과거에도 소환 요구를 무시하고 국외로 빠져나간 사람이 다시 구속에서 풀려난다면 이번에는 잠적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또한 스티븐 리가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수백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만큼, 여전히 금융 거래망과 국제적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보석이 허가될 경우 언제든지 신병 확보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아울러 범죄인 인도 사건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일반 형사 사건과 달리 외국 정부(한국)의 요청에 따라 진행되는 인도 절차에서는 ‘도주 위험’이 조금이라도 존재하면 구속이 원칙이라는 점을 환기시켰다. 한국 검찰이 수년에 걸쳐 수집한 자료와 스티븐 리가 미국 내에서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황을 근거로 ‘조건부 석방’은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스티븐 리 측 변호인단은 스티븐 리가 이미 미국 시민권자라는 점을 부각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이상 그가 다시 한국이나 제3국으로 도주할 이유가 없으며 미국 내에서 법적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었다.
또 지난 17년간 리가 뉴저지 자택에서 아내·자녀와 함께 공개적으로 거주해 왔다는 점을 들며 “숨거나 도피한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왔다. 그가 도망간다면 결국 가족 전체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스티븐 리의 가족과 생활 기반 자체가 사실상 ‘보증인’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한국 검찰의 태도 자체가 모순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2006년 범죄인 인도 청구가 제출된 이후 10년 넘게 신병 확보에 진전이 없었던 사실을 들며 “17년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다가 이제 와서 ‘긴급성을 이유로 구속 유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스티븐 리 보석 허가를 두고 펼쳐진 공방은 과거 도피 전력이 있으니 보석은 불가하다는 검찰 측 주장과 미국 시민권자이자 가족과 함께 공개적으로 생활해온 만큼 도주 우려가 없다는 변호인 측 논리로 맞섰다. 양측은 모두 방대한 서류와 증거를 제출했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보석 여부는 앞으로의 인도 절차에 대한 향방을 가를 첫 분수령으로 부각됐다.
◆ 韓 법무부 공세에도 무너진 ‘구속 유지’
한국 정부의 기대와 달리 2023년 3월 8일 미국 뉴저지 연방지방법원은 스티븐 리의 보석을 허가했다. 법원이 제시한 조건은 현금·부동산·예술품 담보 등 1000만 달러 규모의 보증과 여권 압수, 전자감시(GPS) 장치 부착, 친족 보증인 지정, 이동·연락에 대한 엄격한 제한, ‘가택수감(home incarceration)’이었다.
겉으로는 하루 24시간 집 안에 묶어두는 강력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스티븐 리를 구치소에 수감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스티븐 리의 신분은 ‘구치소에 갇힌 피체포인’에서 ‘집에 머무는 피고인’으로 바뀌었다.
이 결정은 한국 정부가 기대했던 시나리오와는 정반대였다. 체포 직후 한국 법무부는 인도청구서 보완과 증거 목록 업데이트에 착수하며 “신속한 인도 재판을 추진하겠다”는 자신감을 드러낸 바 있다. 이노공 법무부 차관 역시 아시아·태평양 형사사법포럼(APAC)에서 미국 측과 양자 면담을 갖고 “인도 절차의 신속한 처리”를 요청하며 정부의 자신감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미국 법원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한국 정부의 ‘구속 유지’라는 목표가 실패하면서 송환 절차의 흐름은 스티븐 리에게 유리하게 전환됐다. 비록 법적으로 보석은 ‘조건 위반 시 즉시 취소 및 전액 몰수’라는 강력한 제재 장치가 따르지만 이와 동시에 조건을 준수하는 한 피고인의 일상적 자유가 확대될 수 있는 제도다.
결과적으로 스티븐 리는 법원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제한된 자유를 확보했고, 그간 한국 정부가 강조해온 ‘송환 절차의 속도전’ 구상은 출발선에서부터 걸림돌이 생긴 셈이다.
무엇보다 스티븐 리 변호인단이 보석 판결을 발판 삼아 추가 조건 완화와 인도 절차 지연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됐다는 점이 중요했다. 앞으로의 재판 과정에서 ‘조건만 준수하면 도주 우려가 없다’는 논리를 반복적으로 활용할 수 있고, 이는 송환 절차 전반에서 한국 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교회에 자녀 졸업식 참석까지… ‘가택수감’의 허상
스티븐 리는 법원의 보석 결정 직후 ‘가택수감’ 상태에 놓였다. 원칙적으로는 24시간 집 안에 머물며 전자감시를 받아야 하는 강력한 제한이었으나 실제로는 절차가 진행되면서 이 조치가 점차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첫 번째 균열은 종교 활동을 이유로 나타났다. 법원은 스티븐 리에게 주 1회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외출을 허용했다. 이동 경로와 체류 시간, 동반자 등을 사전에 보고하고 전자감시 장치 부착을 전제로 한 조건부 외출이었다. 엄격한 제한이 붙었지만 ‘집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외부 출입이 가능한 상태’로 범위가 넓어진 것이다.
곧이어 가족 관련 사유도 예외로 인정됐다. 자녀의 졸업식 참석 요청이 법원에 제출되자 재판부는 제한적 허용 결정을 내렸다. 마찬가지로 이동 시간과 방문 장소, 동행자 신원까지 구체적으로 통제했지만 스티븐 리는 가족 행사라는 명목 아래 집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게 됐다.

이처럼 ‘가택수감’이라는 강력한 조치 속에서도 예외는 늘어났다. 법원의 가택수감 명령에도 예외조항이 하나둘씩 늘어나며 점차 변질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스티븐 리 변호인단은 “종교 활동이 가능하다면 다른 신앙 관련 행사도 가능하다”, “졸업식이 허용됐다면 다른 가족 의례도 인정돼야 한다”는 식으로 여러 차례 외출 필요성을 주장하며 판정 범위를 넓히려 시도했다.
결국 가택수감은 구속을 대체하는 강력한 통제 장치라기보다, 일정 조건만 충족하면 외출이 허용되는 ‘제한적 자유’의 틀로 바뀌어 갔다. 이는 스티븐 리가 재판부의 관리 아래 있으면서도 사실상 일반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셈이 됐다.
이러한 조건부 외출이 누적되면서 한국 정부가 의도했던 ‘철저한 신병 관리’ 구상은 사실상 힘을 잃기 시작했다. 보석이 유지되는 한, 스티븐 리의 일상은 점차 정상 복원됐고, 이는 송환 절차를 신속히 밀어붙이려던 한국 측 전략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가택수감에서 시작된 작은 균열은 점차 큰 구멍을 내며 송환 전략 전체를 흔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도주 우려’를 전제로 한 구속 유지 논리는 약화됐고, 송환 과정의 주도권은 점차 스티븐 리 측으로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글 시점 요약 타임라인>
2023.3.2: 뉴저지 자택 인근서 체포, 임시 구금 명령.
2023.3.8: 법원, 1000만 달러 담보 조건부 보석 허가(가택수감·전자감시 등 부과).
2023.4.6: 법원, 교회 예배 참석 조건부 외출 허가.
2023.5.24: 법원, 아들 졸업식 참석 조건부 외출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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